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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Nov 06. 2019

아름다운 날들

육아와 사색_21  아기와 나의 비밀스런 대화

 아기가 첫 언어를 말하는 것은 태어난 지 11개월이 될 무렵이며, 표현 언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18개월 즈음이 되어서다. 입을 벌리고 혀를 차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획득하기까지 아기는 어른들의 언어를 수없이 듣고, 비언어적 상호작용에 노출되어야 한다. 따라서 아기의 주양육자는 대답 없는 아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아기 엄마는 답변은커녕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아기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하다. 엄마라는 역할의 옷을 입고 고물거리는 아기를 보고 있으면, 본능적으로 평소와는 다른 말투의 '아기어'를 구사하게 된다. 아기어는 아기를 향한 엄마의 경탄과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말하지 못하는 아기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언어화해주는 도구다. 엄마는 아기의 필요를 민감하게 알아채고, "많이 배고팠구나~ 맘마 먹자", "쉬야해서 축축했어~?"라고 대신 말해준다. 아기를 낳기 한참 전, TV에서 아기를 등에 업은 아줌마가 혀 짧은 소리로 아기 대신 대답하는 것을 소재로 한 개그 프로그램을 보았다. 당시에는 재미있게 봤지만 아기 엄마가 된 이후로 그 개그 프로그램을 떠올리니 아기에게 말을 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엄마의 의지를 희화화한 게 다소 언짢게 느껴진다.

 엄마가 되어보지 않은 이들은 공감하기 어렵고 우스꽝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는 걸 의식하니, 평소에는 보석이에게 혀 짧은 소리로 이말 저말 건네도 제삼자가 함께 있으면 입을 다물게 된다. 시부모님이라도 지켜보고 있을라치면 이따 우리끼리 있을 때 많이 이야기하자고, 눈짓만 보내고 말없이 기저귀를 갈게 되는 것이다. 보석이를 유모차에 태워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아무도 없으면 보석이에게 끊임없이 이말 저말 하는데, 다른 층에서 사람이 타면 입을 다물고 보석이와 눈만 맞춘다. 함께 타고 있던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시 보석이와 나 둘이 되면, 다시 신나게 수다를 떤다. 아직 보석이는 재롱부릴 단계가 못 되기에 내가 재롱을 부린다. 까꿍, 까꿍 하며.

 오늘도 평소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와 보석이 둘만 남자 몸을 구부려 보석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춥지 않았니? 떡뻥이 다 묻었어. 우리 아기는 아주 떡뻥 귀신이야. 떡뻥을 아주 잡아먹듯이 먹더라. 와구와구. 엘리베이터에서의 자투리 시간에 아기를 웃기기 위해 과장된 말과 몸짓을 하고 있자니 엘리베이터 CCTV의 존재를 의식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다. 내가 재롱떠는 모습이 다 녹화되니 온전히 보석이와 나 둘이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어떤 심각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누가 CCTV를 돌려볼 일도 없을 것 같다. 누가 돌려본들, 내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공공장소에서 혀 짧은 소리 좀 냈다고 뭐라 하겠느냐만은.

 실은 출산 전 배가 불러있을 때부터 엘리베이터 CCTV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때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막간의 시간에 부른 배에 손을 얹고 태아의 움직임을 따라 조근조근 말을 걸곤 했다. 추운 겨울 보석이를 낳고, 찬바람 들어갈세라 포대기로 둘둘 말아 소중히 안고 빨리 우리 층에 당도하기를 바라며 발을 구르던 그 날에도 CCTV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이 풀리고 보석이가 50일, 100일이 될 때, 아기띠를 하고 내 턱 밑에서 고른 숨을 쉬고 있는 보석이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겠노라며 입 맞추던 순간을 CCTV는 고스란히 담았다. 더운 여름, 유모차 타기를 거부하는 보석이를 달래느라 쩔쩔매는 내 모습도 CCTV는 기억하고 있다. 유모차 거부를 극복한 늦여름을 지나 가을이 된 지금, 까꿍만 해도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보석이 때문에 CCTV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나는 체면을 차리지 않고 까꿍 거리고 있는 중이다.

 만약 CCTV 속에 난쟁이가 산다면, 팝콘을 먹으며 시간에 따라 변하는 나와 보석이의 대화를 듣고 있을 것이다. 보석이의 성장 과정에 따라 대화 내용은 계속 달라질 것이며, 어느 순간부터 보석이는 대답을 하거나 먼저 질문을 하기도 할 것이다. 보석이는 유모차가 없어도 걷고 뛰면서, 소란을 피워 나에게 혼이 나기도 할 것이다. 보석이가 어른이 되는 먼 훗날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씽씽카를 타고 에버랜드에 가자고 조르는 나이가 될 때까지 우리는 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둘만의 대화를 나눌 것이다. CCTV 안에 있던 난쟁이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난쟁이에게 부탁하고 싶다. 나와 보석이의 비밀스러운 순간들을 잘 보고 기억해달라고. 그 영상을 내가 볼 수는 없겠지만 나와 보석이의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누군가 지켜보고 기억한다고 생각하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은 덜할 것 같다.

 악몽을 꿨는지 자다 말고 한참을 우는 보석이를 달래고 왔다. 안아도 젖을 물려도 달래지지 않고 두려움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악을 쓰고 울기만 했다. 정말 악몽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럴 거라 가정하고 보석이를 안심시켰다. 무서운 꿈을 꿨니? 괜찮아, 꿈일 뿐이야. 엄마가 여기 있다. 엄마가 옆에 있다가 무서운 꿈을 꾸면 항상 안아줄 거야. 여기는 우리 집이고, 우리는 안전하단다. 보석이는 내 말을 알아듣고 있을까. 하루빨리 보석이가 어떤 무서운 꿈을 꿨다고 조잘조잘 하소연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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