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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인형 May 31. 2019

탐험가의 탄생

육아와 사색_ 9

보석이가 태어난 지 80일쯤 되었을 무렵일까. 평소처럼 안아주니 무언가 맘에 안 든다고 버둥거린다. 갓난아기 안기듯 누워 천장을 보고 싶지 않다는, 머리를 위로 해서 내 어깨너머의 세상을 구경시켜 달라는 눈치다. 나는 제법 무거워진 보석이를 세워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얼굴을 내 어깨에 걸쳤다. 보석이는 이제 위안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탐험을 위해 자신을 안아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눈앞의 대상도 주시하지 못하던 시선에 초점이 생기고, 흑백으로 보이던 세계가 색을 입기 시작한다. 우주에 혼자 존재하고 있는 듯 자신의 내부 세계에 빠져있던 아기가 이제 자신 외의 다른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나의 팔에 안긴 채 있는 힘껏 목을 곧추세워 집안 구석구석을 관찰하느라 바쁘다. 무엇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평범한 벽의 모서리나 쿠션의 단순한 무늬 같은 것에 눈 깜박이는 것을 잊을 정도로 한참 동안 집중하고 있다. 쏟아지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아기의 내면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보석이가 새로운 정보를 충분히 흡수하되 피로해지지 않도록, 나는 슬렁슬렁 걸으며 보석이의 시선을 따른다. 보석이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면 나도 거기 머물러 아기의 눈높이를 상상해본다.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모험의 나날일 것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엄마라는 대상을 아직 자신과 분리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아기는 어쩌면 자신이 지금 날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집은 거대한 마법의 궁전 같은 곳이리라. 나는 아기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임무를 맡았다. 


탐험은 길지 않고, 아기는 곧 잠든다. 꿈에서도 두 날개를 활짝 펴 마법의 궁전을 모험하는지 눈을 감은 채 방긋 웃는다.


Photo by Pixabay from Pexels

 

탐험가가 된 지 오래지 않아 방언 터지듯 옹알이가 터졌다. 무성영화 같았던 아기의 하루에 목소리가 입혀졌다. 나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을 걸어 주는 첫 옹알이였으면 좋으련만, 내 아들 보석이는 소파 구석에 놓인 땡땡이 무늬 쿠션을 향해 신나게 옹알댔다. 어느 이국의 언어처럼 들리는 그 말을, 나는 열렬히 환호하고 부지런히 번역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언어가 발아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중이다. 아기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크고 작은 반응을 통해 차차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어른들을 따라 새로운 발화를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기’의 이미지, 토실토실한 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름을 부르면 방긋 웃으며 뱌뱌하고 옹알이를 하는 정도가 되려면 생각보다 꽤 많이 자라야 한다. 신생아는 그렇다 치지만 그 이후에도 자거나, 꿈을 꾸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불편함을 표현하기 위해 울어 젖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채로 꽤 여러 날을 보낸다. 자기 목도 가누지 못한 채 누워서 서너 달을 보내고, 7개월 즈음에야 겨우 기어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12개월이 지날 무렵에 두 발로 걷고 18개월 즈음 대소변 가리기를 시작한다니 보석이에게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인간에 비하면 동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강아지만 해도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로 기어가 젖을 찾아 물며, 소나 사슴 같은 초식동물은 태어난 직후부터 온전하게 기어 다닌다. 인간은 이토록 더디게 성장하지만 그 최종 결과는 동물의 그것보다 월등하며, ‘언어’라는 고차원의 능력까지 갖춘다. 사람은 그에게 주어진 독특한 환경에 맞게 반응하고 적응하여,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등한 능력을 습득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초기 밑그림으로 시작해야 다양한 결과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관찰하고 있는 보석이는 지금 만물의 영장으로 변모하기 위한 첫발을 떼는 중이다. 지금은 비록 시댁에서 기르는 강아지에게도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무시당하지만 이 긴 탐험과 도전의 여정 끝에는 복잡다단한 개성을 가진 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변화의 현장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보석이의 성장을 일분일초도 빠짐없이 낱낱이 지켜보고 싶다. 


아가, 생존은 엄마에게 맡겨다오. 너는 이 모든 세상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너의 것으로 만드는데 집중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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