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를 생각한 이유 (2)
나는 평소에 술을 좋아한다. 아니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술 보다 친구를 좋아한다. 친구들을 만나면 "에이 남자끼리 카페 가서 뭐 하냐"라며 발걸음은 항상 술집으로 향한다. 마치 술은 나와 친구들에게 오은영 박사님과 같은 존재다. 오박사 님과 함께하면 그동안 세상 힘들었던 이야기, 가슴속 깊이 있던 서운했던 이야기, 오글거리지만 엄청 고마웠던 이야기, 눈물 나는 인생 이야기가 술술술술 나온다. 박사님은 요즘 바쁘실 텐데도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음식점에도 있었고, 술집에도 있었고, 편의점에도 있었고, 심지어 집에서도 냉장고 안 추위를 견디며 나와 친구들을 기다려주셨다. "오우 지져스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시군요." 하늘과 같은 은혜에 나와 친구들은 일상 속에서 더더욱 박사님을 찾았다. 결국 우리는 오박사님(술) 없이는 서로 진심 어린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할 정도로 광신도가 되어버렸다.
“믿숩니다! 단 한 방울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광신도가 된 내 주량은 소주 4병이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보다 잘 먹는다는 허세로 술과 미친 듯이 싸우면서 늘었다. "그래 술 오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그렇게 한 병씩 더 먹고, 맥주도 섞어 먹고, 모자라면 위스키도 함께 먹었다. 마치 브레이크가 떨어져 나간 8톤 트럭처럼 먹다 보니 1차는 항상 4차, 5차가 됐다. 신기하게도 20대 초반 까지는 아무리 먹어도 쌩쌩했다. 그래서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먹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고 20대 중반, 후반을 지날수록 기억 잃는 날도, 숙취가 심해지는 날도 잦아졌다. "오빠 오늘도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 또 기억 잃을 정도로 마시는 건 아니지?" 속상하게도 여자친구가 힘들어하는 날도 똑같이 잦아지고 있었다.
나와 여자친구는 오늘째로 2379일,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나고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서로를 고마워하고, 존중하고, 아껴주고, 사랑한다. 우리보다 예쁘게 지내는 연인이 드물 정도로 궁합이 미쳤다. 그 궁합 좋다는 원앙오리가 "야 궁합대결 한 번 할래? 지는 사람 뺨 맞기"라고 하면 내가 수 백번이나 뺨을 때릴 수 있다. 추운 겨울철 떨어지는 오리털로 패딩 하나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신 있다. 하지만 원앙오리에게 이겼다고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원앙오리보다 수 백배는 강력한 그 녀석이 한 번씩 대결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사이가 질투가 났는지 술을 많이 먹은 날이면 항상 나타나서 깽판을 쳤다.
"아이.. 민쥐야ㅏ. 왜에 자아 꾸루 나한ㅌㅔ 화내는 거야아ㅏ..그러며..언 정마알 너ㅓ한 테에 서버섭해애. 나눈 진짜 아로 너 조아하ㅏ는 데에 너어는 왜에 자아 꾸우.. 나한ㅌㅔ 화내는 거냐구우"
그 녀석만 나타나면 오랜 시간 지켜온 우리 사랑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똥 싼 놈이 지랄한다고 사고를 치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랑 여자친구 사이에서 끈질기게 숨어 있다가 내가 방심한 사이에 나타나서 또다시 지랄을 했다. 여자친구를 걸고 대결이라도 하자는 듯이 술만 많이 먹으면 찾아와서 나를 밀어냈다. 정말 짜증 나는 건 원양오리처럼 뺨을 수 백번 때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녀석은 어제의 나였기 때문이다. "어.. 민지야 혹시 내가 어제 무슨 말했어?" 다음날 아침 나로 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무너진 탑을 다시 쌓는 방법은 정말 어렵다. 일단 시작은 "미안해. 진심으로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로 기초를 새로 다진다. 기억이 안 나서 진심이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이다. 말로만 탑을 다시 쌓는 건 사소한 바람에도 견디지 못할 부실 공사다. 정성 어린 사과의 편지와, 사과의 꽃과, 사과의 눈물을 재료 삼아 다시 철근을 세우고,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로 칠한다. 여기서 핵심 포인트는 이것들도 정말 진심이 다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몇 번이나 무너지고 다시 쌓다 보니 재료가 모두 떨어졌다. 다시 재료를 구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내가 평소에 쓰던 건 이미 없었다. 새로운 재료를 살려고 보니 전쟁 후에 물가가 많이 올랐다며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했다. 말도 안 되는 재료비에 소리만 높이다가 결국 구매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무너진 탑을 말로만 쌓고 있는데 여자친구가 진지하게 한마디 했다.
"오빠 나 이대로 가다가는 오빠랑 헤어질 것 같아. 기억 잃을 정도로 안 먹는다고 말해놓고 왜 자꾸 약속을 어겨? 오빠 기억 잃을 때마다 다른 사람 같아. 이제 오빠가 미안하다고, 자제한다고 하는 말도 도저히 못 믿겠어. 오빠는 내가 만만해? 나 힘들게 하는 게 좋아? 제발 나 힘든 것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여자친구와 7년 동안의 만남에서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이게 다 그 녀석이 우리 사이에 껴서 생긴 일이야' 아무리 분노하고, 자책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애초에 그 녀석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방어를 잘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 둘 다 그 녀석을 증오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정을 갖고 있던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7년 동안 우리 사이에서 깽판을 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애증'의 사전적 정의는 사랑과 증오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나와 여자친구는 지금까지 그 녀석에게 '애증'의 마음이 있었던 거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이제 삼각관계를 그만하자고 했다. 그 녀석을 오로지 '증오' 한다고 했다. 나도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할 순간이다. 나를 위해서. 여자친구를 위해서. 앞으로 우리만의 사랑을 위해서.
금주+7일째 (없어 보이게 하루하루 세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