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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홈, 스위트 홈

소설연재

by 태섭
그녀는,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의 집이었다. 그녀의 품은 늘 따뜻했고, 앞으로도 옆에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녀 품속에서 하주는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평온을 되찾았다. 말없이 다짐했다. 이제는 이 마음의 집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하겠다고.

하주와 윤슬이 도착한 곳은 여의도의 어느 고급 일식집이었다. 입구의 미닫이문을 열자 정갈한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그들을 맞았다. 바닥은 물기가 마른 목재처럼 은은하게 빛났고, 작은 분재와 가느다란 조명이 정숙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안내에 따라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윤슬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


"엄마, 아빠! 먼저 와 계셨네요!"


윤슬이 반가운 듯 걸음을 재촉하며 부모님께 다가갔다.


"응, 우리도 방금 왔어. 하주야,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어머님. 잘 지내셨죠?"


하주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말은 공손했지만, 몸 전체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때 윤슬의 아버지가 큼직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고, 하주는 순간 당황하며 손을 맞잡았다. 손이 큰 건지, 긴장한 탓인지 자신의 손이 작게만 느껴졌다.


"그래, 잘 지냈지?"

"네, 아버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자, 다들 앉자고. 이제 주문 좀 할까?"


하주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지도, 등을 기대지도 못한 채 애매한 자세로 앉게 되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테이블 위로, 유자 드레싱이 곁들여진 샐러드가 가장 먼저 나왔다. 그 뒤로 신선한 참치회, 메로구이, 덴푸라, 복지리탕이 차례로 놓였다. 음식이 등장할 때마다 윤슬의 어머니는 한 번씩 설명을 덧붙였고, 윤슬은 그 말에 밝게 반응했다.


"오빠, 왜… 별로야?"


윤슬이 작게 묻자 하주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무 맛있어."


하지만 그는 맛을 잘 느낄 수 없었다. 유자의 산미나 참치의 감칠맛보다는, 머릿속에서 뭉텅뭉텅 밀려오는 생각들이 더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 슬이에게 말해야 할까? 지금 분위기만 더 망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칠 줄 몰랐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그 말. 계약 파기와 이천만 원 손해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계속해서 흔들어댔다.


“하주는 요즘 일은 좀 어때? 할만한가?”


윤슬의 아버지가 하주의 잔에 사케를 채우며 물었다. 하주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잔을 들고 있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그 스스로도 눈치채고 말았다.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노력했다.


“네, 아버님. 응급실에서 힘든 날들이 많지만, 윤슬이 덕분에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엔 글을 쓰고, 책도 보면서 제 삶을 정리해 보려는 중입니다. 이제 조금씩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 윤슬이는 어릴 땐 책 안 읽는다고 고집이 얼마나 셌는지 몰라. 한번 울기 시작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지.”

“아빠! 그런 얘긴 왜 또 해요.”


윤슬이 수저를 들다 말고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에이, 부모 된 사람들 특권이야. 자식 흑역사 꺼내는 거.”


윤슬 어머니도 슬며시 웃음을 보탰고, 잠시 방 안에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하주는 그제야 조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긴장은 여전히 목 뒤에 걸려 있었지만,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걸 하고 싶은가?”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하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방 안의 조용한 공기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크지는 않지만... 작게라도 내 집 마련을 하고 싶습니다.”


윤슬 아버지의 시선은 잠시 접시에 머물렀다. 젓가락을 들어 회 한 점을 천천히 집더니, 말없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 아무리 작더라도 서울이면 금액적으로 무리가 있을 텐데, 괜찮겠나?”


하주는 그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두렵습니다. 몇 억이라는 숫자 앞에 서니 손이 떨리더라고요. 하지만 언젠가 살면서 한 번은 부딪쳐야 하는 문제라면, 그게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에 부동산으로 성공한 간호사 선배도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서 꾸준하게 노력하려고 합니다.”


하주는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다시 술잔이 서로 부딪혔고, 그 소리가 어색함을 조금 덜어주었다. 하주의 손바닥엔 여전히 미세한 땀이 고여 있었다. 목 안쪽이 답답하게 타들어갔다. 그가 진짜로 털어놔야 할 이야기는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엄마, 아빠. 나 하주 오빠 지하철 타는 데까지만 바래다주고 올게요."


부모님은 미소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둘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시원한 여름밤의 공기가 그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하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슬아, 부모님 기다리시는 거 아니야?"

"괜찮아. 엄마, 아빠도 오래간만에 서울 데이트하시겠지. 우리도 덕분에 이렇게 걸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야?"


윤슬의 밝은 목소리에 하주도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커피 한 잔 먹으면서 조금 더 얘기하다 갈까?"

"우와 좋아! 오빠, 그럼 일석삼조네!"


둘은 지하철역 근처의 작고 조용한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의 짙고 부드러운 향기와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둘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윤슬이 손에 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 오늘 엄마 아빠가 정말 좋아하신 거 알아? 특히 아빠가 생각보다 이야기 많이 하셨어."


하주는 커피잔을 손 안에서 천천히 돌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정말? 다행이다."


윤슬은 하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속삭였다.


"근데 오빠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


하주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말을 이제는 해야 할 때였다.


"슬아, 사실... 지난번에 같이 봤던 그 아파트 있잖아. 나 그 집, 계약했었어."


윤슬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놀람과 기대, 그리고 약간의 긴장감이 그녀의 표정에 그대로 담겼다.


"정말? 근데 오빠 표정이 왜 그래?"

"근데... 잔금 대출이 안 나와서 계약이 깨졌어. 가계약금으로 2천만 원 넣었는데... 그걸 날렸어."


윤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아무 말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로등 불빛이 조용히 흔들렸다. 하주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여러 감정이 오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답답함일까,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하주는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문득, 이 모든 일이 결국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벌어진 일이었기에, 그녀도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알아주었기를 바랐다.


"미안해, 슬아. 미리 말하지 못해서. 다 잘될 줄 알고 놀라게 해 주려고 했었는데..."

“오빠... 괜찮아. 우리 결혼 때문에 성급하게 알아봤던 거지?"


하주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등을 쓰다듬었다. 마침내 윤슬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곁으로 다가와 하주 옆에 앉았다.


"오빠, 내 눈 좀 봐. 그동안 혼자 힘들었겠다."


하주는 그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신의 성급한 결정으로 그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윤슬은 그런 하주의 얼굴을 손으로 살며시 잡고 자신 쪽으로 돌렸다.


"왜 바로 말하지 않았어.. 그런 일 있었으면 같이 걱정해야지..."


하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윤슬의 눈을 마주쳤다. 윤슬의 동그랗고 맑은 눈이 미소로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미소는 하주의 모든 걱정을 조금씩 녹여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미소를 따라 웃었다. 이 여자와 함께라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아, 내가 다시 노력해 볼게. 이번엔 정말 제대로 준비해서 너와 내가 함께 살 수 있는 예쁜 집을 꼭 마련하고 싶어."


윤슬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빠 믿어. 언제나 믿었지만, 이번엔 더 믿을게. 그리고 이번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꼭 말해줘. 우리는 언제나 함께잖아."


하주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그의 품 안에 조심스럽게 기대어졌다. 체온과 숨결이 그의 심장에 직접 스며드는 듯 따뜻했다. 사랑이란 건- 어느 날 문득, 자기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되는 감정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오랜 시간 지켜봐 준 그녀였기에, 마음 깊은 곳부터 조용히, 아주 조용히 '고맙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고마워, 슬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주는 깨달았다. 이 실패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와 함께 가고 싶은지를 다시 묻는 일이라는 걸. 윤슬에게 프러포즈했던 그날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의 집이었다. 그녀의 품은 늘 따뜻했고, 앞으로도 옆에서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녀 품속에서 하주는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평온을 되찾았다. 말없이 다짐했다. 이제는 이 마음의 집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하겠다고.


며칠 후,

하주는 찬식과 함께 첫 아파트 현장 방문에 나섰다.


그날은 아침부터 맑고 청명했다. 하지만 부동산 앞에 서자, 하주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실패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막상 현장에 서자 다시 두려움이 밀려왔다. 분명히 철저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야, 하주야.”


찬식이 그런 하주의 어깨를 가볍게 툭 두드렸다.


“네?”

“너무 긴장하지 마. 이제 처음도 아니잖아. 자, 들어가자."


찬식이 먼저 부동산 문을 열었다. 문 위의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사무실 안에는 부동산 사장님 한 분이 앉아 있었는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와 파일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집 있으세요?”

“네, 저희 아파트 몇 군데 좀 보려고 왔습니다. 이쪽 친구가 신혼집을 준비하고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혹시 보시고 싶은 곳 있으세요?”


사장님이 물었지만 하주는 막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찬식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네, 22평에서 30평 사이로, 방 3개 정도 있었으면 합니다. 위치는 지하철역이랑 도보 10분 안이면 좋겠고, 신혼부부니까 초등학교나 공원, 마트 같은 생활환경도 중요하고요.”


사장님은 바로 지도와 자료를 꺼내 자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하주는 그제야 찬식이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깨달았다. 혼자였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섰을지도 몰랐다.


첫 번째 집으로 가는 길, 찬식은 하주에게 작은 노트와 펜을 건넸다.


“이거 받아. 오늘 보고 느낀 점을 바로바로 적어두는 게 좋아. 기억은 생각보다 빨리 흐려지니까. 아 그리고 사진은 막무가내로 찍으면 안 돼. 정 찍고 싶으면 먼저 정중하게 부탁하는 게 예의야.”


하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노트를 받아 들었다.


처음 방문한 아파트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밝았다. 방마다 햇빛이 고루 들어왔고, 바닥은 반짝일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향 또한 아늑한 숲 속에 와있는 듯했다. 찬식은 하주에게 하나씩 세세하게 체크할 포인트를 알려줬다.


“집은 겉보기에 깨끗하다고 다가 아니야. 이 집에 네가 산다고 생각해 봐. 일단 거실에서 창밖 풍경을 봐야 해. 앞에 높은 건물이 올라올 가능성이 있는지, 소음은 어떤지. 집을 살 때도, 팔 때도 뷰가 제일 중요해."


하주는 찬식의 말을 꼼꼼하게 노트에 적었다.


“다음으로는 천장 누수가 없는지 보고, 욕실의 환기 상태도 봐야 해. 나도 처음 계약할 때 성급해서 집 상태 제대로 안 보고 샀다가, 누수 때문에 엄청 고생했거든. 그래서 꼭 천장과 욕실을 확인하는 거야. 아! 현관 수납공간도 중요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살다 보면 정말 불편할 수도 있어.”


노트에 적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제는 실제로 둘러봐야 했다. 하주는 베란다로 나가서 바깥 풍경을 봤다. 저 멀리 63 빌딩, 그 뒤로 남산 타워가 보였다. 그 좌측으로는 여의도가 보였다. 하주가 입을 떡 벌리고 보고 있자, 집주인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미세먼지가 없는 날에는 멀긴 하지만 우측으로 롯데타워도 보인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하주는 베란다를 나와 거실과 주방을 걸었다. 목을 젖혀 천장도 보고, 욕실에 수압은 괜찮은지, 가구 안쪽에 곰팡이는 없는지도 살펴봤다. 부동산 사장님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열심히 보시는 분들은 진짜 오랜만이에요. 보통 젊은 분들은 그냥 슥 둘러보고 끝내거든요.”


하주는 그 말을 듣고 살짝 민망했지만, 찬식은 오히려 든든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동생이 처음이거든요. 실수 안 하게 옆에서 잘 도와줘야죠.”


두 번째 집, 세 번째 집을 둘러보는 동안 하주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엔 질문 하나 던지기도 어려웠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물어보고 궁금증을 해결했다. 찬식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을 때마다 하주는 더 힘을 얻었다. 마지막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 찬식이 말했다.


“하주야, 나도 처음엔 부동산 아무것도 몰랐어. 엄청 많이 헤맸지. 그러면서 돈도 꽤 잃었고.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실패들이 결국엔 내 성공의 가장 큰 지름길이었어.”


하주는 가만히 찬식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기 경험만큼 중요한 게 남의 경험을 빌리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직접 실패해서 얻는 경험만큼 값진 게 없지만, 남의 실패는 그 과정을 빠르게 건너뛰게 해주는 거니까. 네가 오늘 나한테 도움을 청한 것도 결국 네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선택한 거야.”


하주는 노트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실패를 경험이라고 말해주는 찬식이 고마웠다. 더불어 스스로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용기를 낸 자신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찬식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집 볼 때 어떤 걸 봐야 하는지 제대로 봤지? 이렇게만 하면, 네가 원하는 집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확신해.”

"네, 함께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좋은 집 사면 꼭 초대해라."


하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웠지만 다시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마음 깊이 차올랐다. 오늘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주의 마음속 두려움은 조금씩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병원 앞 카페에서 동기들을 마주쳤다. 오상혁과 신태호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하주가 다가가자 상혁은 두 손을 크게 돌리며 하주의 어깨를 쳤다.


"야, 임하주. 요즘 너 얼굴 좀 폈네? 커피 먹을래?"


하주가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방금 하나 시켰어. 얘들아, 나 요즘 집 좀 보러 다니거든. 진짜 찬식쌤 덕분에 많이 배웠다."


태호는 관심 없다는 듯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또 집 타령이냐? 계약 망쳤다는 게 엊그제 같은데."


하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말했다.


"그때랑은 완전 다르지. 나 원래 3달 동안 30군데 보는 게 목표였는데, 한 달 만에 벌써 15군데 봤어. 혹시 너희들도 같이 가볼래?"


하주의 질문에 태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야, 나는 됐다. 내가 집은 무슨. 지금 주식하는 것도 벅차."


상혁은 가만히 있다가 이내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야, 그거 재밌겠다! 나도 한 번 따라가 볼까?"


하주는 미소를 지었고, 태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때 상혁이 갑자기 하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근데, 하주야. 혹시 가면 집 말고 딴 거 할 시간도 좀 있냐?”


하주는 상혁을 바라보다가 잠깐 멈칫했다.


“뭐? 딴 거라니?”


상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아니 그냥, 중간에 지루하면 지금처럼 커피도 좀 마시고,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아무 계획 없이 돌아다녀도 보고 말이야. 난 그래야 재밌던데.”


하주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상혁은 장난기 어린 눈으로 하주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고, 태호는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둘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잠깐의 정적이, 세 사람 사이에 조용히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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