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망망대해에 꼼짝없이 갇힌 줄 알았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고 이러다가 죽겠구나 했는데, 하나의 등대가 그를 비춰왔다. 표류하는 뗏목 위 조난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빛. 살아 나갈 수 있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어. 그 말 한마디가, 하주의 마음속 어둠을 조용히 걷어내고 있었다.
하주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은 텅 빈 것 같았고, 온몸이 무거웠다. 잃어버린 건 돈만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그토록 조심스럽게 준비한 첫 계약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윤슬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다시 준비해서, 아무 일 없던 듯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하주의 손끝은 차가웠고, 마음은 점점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진동음이 울렸다.
[신태호] 지금 뭐 하냐. 나 지금 너네 집 근처인데, 간단하게 치맥이나 할래?
하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나가기로 했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이 감정이 덜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혼자 있는 것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둘은 집 앞 치킨집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았는지 힐끔 쳐다봤다. 하주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눈은 여전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잠잠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런 하주의 상태를 눈치챈 태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너 표정 안 좋은 거... 혹시 그때 그 계약 관련된 거야?”
하주가 눈을 돌렸다.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며칠 전에 화장실 가다가 전화하던 거 우연히 들었어. 폰도 떨어뜨리고, 말투도 심상치 않던데.”
하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 사실 나 부동산 계약했었어. 서울에 있는 구축 아파트였는데, 대출 문제로 계약 파기당했어.”
신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보였지만 속으론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아파트라니... 난 아직 빌라도 버거운데.'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같이 일하고, 같이 야식 먹고, 같이 피곤해하고. 그런데 하주는 어느새 자신보다 한 발짝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게 이상하게, 배신감처럼 느껴졌다. 아닌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굳어졌다. 말을 건네기 전, 태호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스스로의 초라함이 가슴을 찔렀다.
태호가 곧 말문을 텄다.
“그래서, 얼마나 잃었는데?”
"2천만 원. 힘들게 모은 돈이었어... 그런데 한 순간에 사라졌다."
"야, 현실적으로 갑자기 그런 걸 사면 어떡하냐. 서울 아파트가 장난이냐. 게다가 너 지금 부동산 공부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신태호는 진심으로 위로를 해준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하는 말의 단어들은 하주의 갈비뼈 사이에 단단히 박혔다. 지금 하주에게 필요한 건 설명도 충고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의 이해와 공감이었다. 빗장뼈 아랫부분이 묘하게 짓눌렸다.
“그래... 피곤하다. 나 먼저 일어날게.”
하주는 치킨 몇 조각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도착한 하주는 샤워도 안 하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오늘 하루가 마치 한 달처럼 느껴졌다. 몸은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생각은 쉬지 않았다.
'윤슬에게 뭐라고 말하지?'
'다시 돈을 모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시간은 새벽 5시. 하주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어차피 출근이면 차라리 병원 가서 눈이라도 조금 붙이는 게 낫겠다...'
후드 하나를 걸치고, 대충 말린 머리 위로 모자를 눌러썼다. 그는 살짝 쌀쌀한 새벽 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탈의실 문을 열자, 안쪽 구석에 책상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조용히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든 사람.
“하주야, 오늘은 많이 일찍 왔네? 근데... 너 모습이 왜 그러냐?”
“어?... 찬식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유찬식이었다. 그는 하주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다는 듯이 서로의 거리를 좁혔다.
“얼마 안 됐어. 근데 하주야, 요즘 별일 없냐?”
“예, 그럼요.”
“거짓말.”
“하하... 혹시 그렇게 티가 나나요?”
“인생에 진눈이야. 눈 밑은 왜 그렇게 퀭하냐.”
하주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웃음보다는, 피로에 짓눌린 근육이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에 가까웠다. 찬식은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환자의 얼굴을 읽어온 응급실의 베테랑에게, 그런 표정은 감출 수 없는 신호였다.
“요즘 부동산 공부한다고 했었지? 혹시 그거 때문에 그래?”
하주가 놀란 눈으로 찬식을 바라봤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병원 소문 빠르잖아. 그리고 네 얼굴 보면 딱 보여. 첫 투자, 망했구나 싶더라.”
찬식은 가볍게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가서 커피 한 잔 할래? 내가 살게.”
병원 구내 카페. 이른 아침의 적막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무슨 일이었는지, 천천히 말해봐.”
찬식이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하주는 컵을 들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며칠 전에 아파트 계약했다가... 대출 확인을 제대로 못해서 파기됐어요. 위약금으로 이천만 원 날렸고요. 아직 여자친구한테도 말도 못 했어요...”
목소리는 낮았고, 말은 끝을 흐리며 꺼졌다. 무너진 자존감과 조심스러운 후회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끝내고 하주는 커피잔만 바라보았다. 찬식 또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는, 그런 침묵이었다. 따뜻했던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찬식이 커피잔을 들며 침묵을 깼다.
“이천만 원이라... 그 돈이 어떤 의미였을지, 나도 알지.”
하주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금방 빠져나갔지만, 돈을 모으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지나온 시간들이 떠올라 목이 먹먹해졌다.
“사실 나도 너 나이 때 비슷한 일이 있었어. 첫 투자였는데, 오천만 원이 날아갔지. 그때는 연봉 2년 치였어.”
“오천만 원이요?”
하주는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찬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이 4천 원 하던 시절이니까, 지금으로 치면 거의 두 배는 넘겠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근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실패 덕분에 내가 여기에 있더라.”
하주는 그 말을 곱씹었다.
‘찬식 선배도 그런 적이 있었다니.’
그동안 자신의 실패가 이 세상에서 오직 혼자만 겪은 최악의 일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다르게 보였다. 무너진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는 사실은 이상한 위로가 됐다.
"근데 말이야"
찬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한 번 생각해 봐. 이번에 네가 만약 대출까지 잘 받고 그 집에 들어갔다면? 너 스스로 ‘나 투자 잘하네’라고 생각했겠지."
하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야. 그때부터 사람은 자기 판단을 믿게 되고, 작은 성공에 자만해지면서 더 큰 무리수를 두게 되거든.”
그의 머릿속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지나갔다.
"너는 2천만 원이 날아갔지만, 그 돈 반년이면 다시 모을 수 있어. 그런데 만약 그게 본계약이었고, 중도금까지 들어간 상황이었다면? 손해는 상상 이상이었겠지."
순간 하주는 입 근처에 있던 손톱을 물어뜯었다.
“사람은 다 똑같아. 결혼을 약속했는데 준비는 부족하지, 직장은 그만두고 싶지, 불안하지. 그런 상태에서 좋은 집을 보면 누구라도 덜컥 손이 가게 되어 있어. 나도 그랬고.”
하주는 자신의 어깨 위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럴 때 투자를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
찬식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하주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앞서거든. 확신이라고 착각하는 감정 말이야. 그런 감정은 그때는 엄청나게 강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하루만 지나도 많이 가라앉아. 그제야 진짜인지 아닌지가 보이지.”
‘나는 왜 하루도 기다리지 못했을까...’
“하주야, 너 지금 너무 잘하고 싶어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야.”
하주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작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잘하고 싶었다. 너무나도 잘하고 싶었다. 그녀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찬식의 말은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실패가 당연한 거고, 그걸 통해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게 진짜 성공이야.”
하주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 식은 커피였지만, 향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무의식 중에 굽혔던 어깨도 피고 있었다. 마치 숨통이 조금 트인 사람처럼.
“네가 실패했다는 건, 적어도 도전했다는 뜻이야. 그걸 반복했다면, 너는 더 대단한 거고. 언젠가 너도 성공할 거야. 그때 네가 지금 겪는 실패는 전부 자랑거리가 될 거다.”
하주의 눈가가 서서히 뜨거워졌다.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았다. 괜히 눈을 껌뻑이며 그 감정을 눌렀다. 더 이상 자신은 실패자가 아니었다. 망망대해에 꼼짝없이 갇힌 줄 알았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고 이러다가 죽겠구나 했는데, 하나의 등대가 그를 비춰왔다. 표류하는 뗏목 위 조난자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빛.
살아 나갈 수 있어.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어.
그 말 한마디가, 하주의 마음속 어둠을 조용히 걷어내고 있었다.
"하주야."
잠시의 침묵 끝에, 찬식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다.
“내가 너에게 미션을 줄게. 네 신혼집을 위해서 앞으로 석 달 동안 수도권의 아파트 30군데를 직접 보고 와. 단순히 둘러보지 말고 입지, 가격 흐름, 생활환경, 공급까지 꼼꼼히 체크해서 기록해. 하나만 보고 결정한 게 너의 첫 번째 실수였어. 여러 군데를 비교하다 보면 자연히 기준이 생길 거야.”
"네..? 그렇게까지 많이요?"
하주는 놀라 입을 벌렸지만, 찬식은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하나 더 들었다.
“두 번째는 대출 공부."
"... 아, 그거 때문에 계약 파기됐으니까요."
"그래. 부동산 기초 공부는 열심히 했겠지만, 그게 부족했어. 내가 책 세 권과 유튜브 채널 두 개 추천해 줄게. 그리고 세 군데 이상의 은행에서 직접 상담도 받아봐. 대출은 어려운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야.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길이 보여."
하주는 손끝에서 작은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앞둔 설렘이었다.
“하주야, 다시 걷는 법부터 시작하자. 실패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지. 분명히 내 집 마련의 밑거름이 될 거야.”
하주가 마침내 어깨를 쫙 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블랙홀 같은 두 눈동자에는 다시 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카페의 작은 간접등 속에서도 유난히 빛났다. 찬식의 말이 끝나고 하주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빠르게 메모장 앱을 열고 그가 들은 조언 몇 줄을 조심스럽게 적었다.
[신혼집 - 3달 동안, 아파트 30곳 방문하기]
[대출 상담 - 은행 3곳 이상 방문]
손가락 끝에 여전히 망설임이 있었지만, 마음은 이전과 달랐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네, 선생님.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요.”
그 말에 찬식은 웃지도, 바로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무언의 동의가, 오히려 어떤 말보다 더 깊은 믿음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둘은 서둘러 커피를 정리하고, 함께 발걸음을 응급실로 돌렸다.
"아 그리고 이번 주에 쉬는 날 한 번 맞춰보자. 첫 단지는 나랑 같이 가보자고."
하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자신을 이끌어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왔다. 다시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함께할 수 있다는 든든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직 집은 없지만, 이제 방향은 생겼다. 하지만 다시 걷는다고 해서 그녀가 기다려줄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근무가 다시 시작됐다. 찬식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고, 하주는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근무는 덜 버거웠다.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동료들과 가볍게 웃기도 하며, 하주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퇴근 시간,
하주는 인계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깨가 무거웠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전화를 걸어야 할 사람이 있어서였다. 병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윤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슬아,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같이 아파트 좀 보러 다닐까 해서... 그리고, 말해야 할 게 있어.”
“주말? 오빠 벌써 잊었어? 이번 주말에 우리 부모님 서울 오셔서 밥 같이 먹기로 했잖아.”
하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 맞다. 어머님, 아버님 오신다고 하셨지. 미안, 이번에 이것저것 보느라 좀 정신이 없었나 봐.”
“괜찮아. 엄마 아빠가 오빠 맛있는 거 사준다고 벌써 레스토랑도 예약해두셨어.”
윤슬의 말은 따뜻하다. 그런데 그 따뜻함이, 오히려 하주의 속을 더 복잡하게 뒤흔들었다. 이천만 원이 사라진 통장, 말하지 못한 사실, 그리고 윤슬 부모님과의 식사.
모든 것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오빠? 왜 대답이 없어?”
하주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응, 당근 주말에 뵈야지...”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하주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6월의 여름밤,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