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이제까지 가만히 멈춰 있었다고 해서 뒤처진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각자의 방향과 속도는, 그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멀고도 기니까.
태호는 탈의실 한쪽 구석 좁은 벤치에 앉았다. 벽에 등을 대자 서늘한 기운이 티셔츠를 뚫고 천천히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이 차갑고 눅눅한 공기조차 지긋지긋했다. 같은 냄새, 같은 공간, 같은 벽의 감촉. 반복되는 시간들 속에서 자신만 조금씩 바래가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을 꺼두고 싶었다. 태호는 벽에서 등을 떼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귓가를 스치는 소리들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사물함 문이 부딪히는 둔탁한 쇳소리, 누군가 옷을 벗는 가벼운 움직임, 희미하게 섞이는 말소리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오! 신태호, 오늘 일찍 왔네?"
"어, 왔냐."
태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짧게 웃었다. 하주와 상혁은 손에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들처럼 밝은 기운이 번졌다.
“진짜? 어제 거기까지 갔다 왔다고?”
“응. 경기도라 확실히 멀긴 한데, 오늘 너랑 본 신도림보단 확실히 신축 느낌이야. 혁아, 그래도 우리 출근 전에 세 군데나 봤다.”
"오, 많이 본 거야? 난 그 할머니 계셨던 집이 좋았어. 강아지가 내 발에 자꾸 코를 들이밀었잖아."
"강아지? 아, 그랬지. 네 발 냄새가 조금만 덜 났어도 조용히 보고 왔을 텐데."
"나 때문에 자꾸 짖은 거였어? 몰랐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긁는 것 같았다. 태호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지만, 어느새 손톱 끝으로 화면을 천천히 긁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침이 시큼해지는 것을 느꼈다. 명치끝이 뻐근했다.
'또 시작이네.'
그는 자신 안에서 피어오르는 이 끈적한 감정의 이름을 애써 외면하며 핸드폰 화면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피곤하지도 않을까? 저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슬쩍 올려다본 하주 얼굴은 오히려 뭔가를 이뤄낸 사람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상혁은 늘 그렇듯 환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의 결을 태호는 끝내 읽어내지 못했다. 정말이지 즐거운 걸까, 아니면 그저 하주의 열정에 얹혀 함께 떠오르는 것뿐일까.
태호에게 열정은 이제 낯선 감정이라 생각되었다. 그 순간, 열려있던 자신의 사물함 속에서 낡고 구겨진 노트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인체 해부학-b반 신태호]
노트를 손에 들고 천천히 넘겼다. 흐릿하게 펜 자국이 번진 빽빽한 필기 사이로 인체 장기의 세밀한 그림이 보였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자 어느덧 익숙한 기억이 태호의 시선을 붙잡았다.
시험이 끝난 늦은 오후, 모두가 술 마시러 떠난 빈 도서관. 혼자서 의자에 앉아있는 태호가 있었다. 의자는 자세를 살짝 바꿀 때마다 미세한 삐걱 소리가 났다. 손끝이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들리는 사각거림.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창밖에서 어둠이 밀려오는 동안 도서관의 조명은 천천히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그 순간 그는 혼자였지만 이상하게 충만했다. 누군가 인정하지 않아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순간이었다. 고요하고 간절했던 과거의 모습이 너무 선명해서 잠시 멈칫했다.
'나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은 아득히 먼 시간처럼 느껴졌다. 간절함도, 열정도, 도전도, 지금의 자신과는 무관한 단어였다. 편안한 건지, 무너진 건지... 마음 한가운데가 자꾸 모호하게 흔들렸다.
"야, 태호야. 옷도 안 갈아입고 뭐 하냐? 같이 올라가자."
"냅둬. 태호 늦어서 커피 산대. 야, 잘 마신다?"
그들의 목소리에 태호는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자, 그 둘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태호는 어색함을 지우듯 짧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의리 없게. 일 분만 기다려봐."
탈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태호의 머릿속엔 문득 떠오른 질문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주는 너무 애쓴다. 마치 세상과 씨름하듯. 상혁이는 너무 낙관적이다. 그럼 나는, 어디쯤일까?'
그렇게 머릿속에 던져진 질문은 그가 일하는 도중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퇴근 후, 병원 옆 골뱅이집.
늦은 밤에도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몇 분 전까지 ‘살려달라’는 비명이 메아리치던 응급실의 소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태호와 상혁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서로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쳤다. 하주는 퇴근 후에도 아파트 단지의 분위기를 보러 가야 한다며 빠져버렸다. 그런 하주의 뒷모습이 어쩐지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였다.
"크... 이 맛에 산다 진짜. 오늘 하루는 좀 심했지 않냐?"
상혁이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들이키며 말했다. 얼굴에 퍼지는 환한 웃음은 방금 전까지 겪었던 힘듦을 금세 잊어버린 듯했다.
"그니까, 환자가 어떻게 퇴근 직전까지 터졌지? 오늘 이만보 걸었어."
태호도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무릎을 주무르듯 눌렀다.
"아 맞다, 내가 너한테 말했나? 오늘 하주랑 임장 갔다가 진짜 웃긴 일 있었는데."
상혁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만을 기다린 표정이었다.
"뭔데 또?"
"나랑 하주랑 둘이 땀 뻘뻘 흘리면서 부동산 들어갔거든? 근데 사장님이 우리 보자마자 아주 귀찮다는 표정으로, '젊은 친구들이 여기 공부하러 온 거 아니에요?' 하면서 쫓아내는 거 있지?"
상혁이 마치 연기하듯, 사장님의 표정을 흉내 내자 태호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하주 표정 장관이었겠다."
"그래서 하주가 진지하게 전략을 짰다니까. 바로 옆에 큰 병원이 있었는데, 우리가 의사고 곧 이쪽 병원으로 이직한다고 연기를 하자는 거야. 그렇게 해야 우리가 어려 보여도 집을 보여준다고."
태호는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주가 진짜 그런 걸 하자고 했다고?"
"그렇다니까. 하주 가끔 보면 똑똑한 거 같아. 나도 옆에서 얼마나 열심히 연기했는지 몰라. 거의 뭐 영화 찍듯이, '선생님, 저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오상혁이라고 합니다.' 막 이러면서."
상혁은 그때를 떠올리며 깔깔댔다.
"아이고, 부동산 사장님 제대로 속으셨겠네."
"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사장님이 마지막에 하주한테 한 말이야. 눈이 똘망똘망하고, 공부도 잘했으니까 부동산 투자도 잘할 거 같다고 막 칭찬하는 거야. 완전 하주한테 반한 거지."
상혁은 테이블을 툭툭 치며 웃었다.
"아니, 하주는 원래 눈이 큰 건데. 그걸 가지고 막 칭찬하는데 난 진짜 그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 떡볶이집 아줌마인 줄 알았다. 하주 진심 잡아 먹힐 뻔했어."
태호는 웃으면서도 맥주잔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머릿속 한편에 작은 가시가 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혁이도 이렇게까지 하주랑 돌아다니는데...'
마음 한쪽에서 불안과 안도가 교차했다. 적어도 아직 상혁이는 집 보다, 연기했던 게 더 즐거운 듯했다. 태호는 은근히 안심하며 상혁에게 물었다.
"혁아, 너는 병원 말고 다른 거 해볼 생각은 안 해봤어?"
상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유튜브 했었잖아. 그때 말했었는데 기억 안 나? 카메라랑 마이크랑 비싼 장비 왕창 사서 집에다 설치하고는 딱 일주일 만에 그만뒀지. 장비만 있다고 안 되겠더라. 편집, 그게 사람을 잡더라고."
상혁의 웃음은 여전히 밝았다.
"그거 말고도 얼마 전엔 상민이 형 따라 코인 투자도 해봤다니까. 근데 이게 또 내 손만 타면 왜 이렇게 다 떨어지냐. 결국 돈만 잃고 빠져나왔지 뭐. 형은 그거 덕분에 퇴사까지 했다던데..."
상혁의 실패담이 한 문장씩 나올 때마다, 태호는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해서, 태호는 맥주잔의 차가운 표면을 세게 쥐었다. 친구의 실패에 안심하는 속물. 그게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혁은 잠시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야, 근데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남 따라가면 뭐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엔 다 각자 인생이 있더라. 난 그냥 뭐라도 재밌으면 되는 거 같아. 뭐랄까, 인생도 연기 같다고 해야 하나? 재밌게 살아야지."
그 말이 태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랜만에 무언가 편안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상혁의 말처럼,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맞아. 인생은 재밌게 살아야지."
태호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날의 맥주는 여느 때보다 시원하고, 조금 더 씁쓸했다.
한 달 뒤,
탈의실에 먼저 도착한 태호는 느긋한 표정으로 벤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출근 10분 전, 이 순간만큼은 혼자서 아무 생각 없이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하주였다.
“어, 태호야. 너 벌써 왔구나?”
하주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의 얼굴엔 땀이 범벅이었다. 옷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평소 깨끗하던 운동화에도 먼지 자국이 선명했다.
"와 진짜 겨우 세잎 했다. 하마터면 커피 살 뻔했어."
태호는 그런 하주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야, 아직 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그렇게 땀 흘리고 있어?”
하주는 웃으며 사물함 문을 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피로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태호는 분간할 수 없었다.
“아, 나 집 보고 오는 길이야. 이번에는 밖에서 좀 오랫동안 있다가 왔거든."
태호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너 요즘 몇 군데나 본 거냐? 무슨 하루라도 안 가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굴고 있어.”
하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50군데 봤어.”
“50군데?”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숫자가 어쩐지 가볍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토록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주는 이마의 땀을 팔로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 드디어 계약할 집을 다시 찾았어. 사실 처음 집 보러 다닐 때, 찬식쌤이랑 가봤던 곳이야. 처음 봤을 땐 그냥 좋다 정도였거든? 근데 그 뒤로 50군데를 돌다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하주는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 태호를 보며 눈을 빛냈다.
“세상에 싸고 좋은 집은 없다. 하지만, 나와 어울리는 집은 있다. 그 집 문을 다시 열었을 때, 그때 딱 깨달았어. '아 여기가 진짜로 나랑 어울리는 곳이구나.' 집안 느낌부터 앞에 전망까지. 내가 거기에 앉아서 여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더라. 진짜 기분 묘했다."
하주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히 어떤 진심이 담겨 있었다. 태호는 처음으로, 하주의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눈빛.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이러려고, 첫 계약이 깨졌던 건지도 몰라.”
하주는 그렇게 말하며 혼잣말처럼 작게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이 태호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다. 실패조차 다음의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삼아버리는 하주의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동안은 그저 ‘열심히 사는 녀석’ 정도로만 하주를 보고 있었다. 적당히 인정하고 적당히 비웃는 거리감 속에 자신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누군가는 이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존경인지, 질투인지 구분되지 않는 감정이 태호를 괴롭혔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하주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그걸 얻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달리고 있다는 것. 지금의 하주는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하주는 진심이었구나.’
어쩌면 그가 전력으로 뛰고 있는 동안, 자신은 멀찍이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몸이 고장이라도 난 듯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야 신태호, 갑자기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하주의 목소리에 태호는 놀라듯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무심히 웃으려 했지만,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다.
"아니, 야 땀 좀 닦고 다녀라. 누가 봐도 지금 네가 환자야."
애써 농담을 던지며 태호는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상하게도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 억눌렀던 열망인지, 후회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졌다.
오늘 하루도 인계시간은 무사히 찾아왔다. 고요한 태호의 집. 여름밤의 공기가 창문 틈을 통해 조용히 흘러 들어왔다. 그는 소파에 힘없이 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TV 화면은 금세 환하게 켜졌지만, 태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들었고, 그는 결국 볼륨을 낮추고 화면을 꺼버렸다.
어두워진 화면에 비친, 텅 빈 눈의 남자와 마주쳤다. 면도날에 베인 상처처럼, ‘초라함’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초라하다고? 아니, 어쩌면 실패조차 할 용기가 없었기에 더 초라한 것일지도...'
그는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현실적인 것뿐이라고, 안정적인 길을 택했을 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어왔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하주처럼은 못 할 것 같다. 그렇게까지 달릴 자신은 없어.’
작은 목소리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올라왔다.
‘그런데 나도 그런 때가 있었잖아...’
다시 떠오른 해부학 노트의 기억.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도서관에 끝까지 남아 있던 그때. 지금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언제부턴가 멈춰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더 이상의 실패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패조차 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태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무심히 넘기다가, 하주와 놀러 갔을 때 찍었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하주는 지금처럼 밝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오늘 본 사람과는 달랐다.
‘나는 아직 내 길을 찾지 못한 걸까.’
태호는 긴 숨을 내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질문이 조용히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쯤일까.’
그 질문은 불편하기보다 오히려 이상하게 편안했다. 어디쯤인지 모르기에 앞으로 갈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그의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태호는 하주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천천히 자판 위를 움직였다.
[내일 계약 잘해라, 하주야.]
[응원한다.]
태호의 손가락이 메시지를 보내자, 왠지 손끝이 찌릿하게 떨렸다. 이 작은 행동 하나가 왜 이렇게 어색하고 커다랗게 느껴질까. 메시지가 전달됐다는 표시가 뜨자,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감정이었다. 질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희미한 부러움과 응원이 섞인 듯한. 태호는 이제 작게 미소 지었다.
‘하주는 자기 길을 잘 찾은 것 같네. 나도 이제 찾아봐야지.'
그 말이 마음속에서 깊이 울렸다. 이제까지 가만히 멈춰 있었다고 해서 뒤처진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각자의 방향과 속도는, 그렇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은 멀고도 기니까.
이제야 태호는 아주 천천히라도 움직이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엔 여전히 여름밤의 공기가 고요히 흘렀다. 하주의 길과, 상혁의 길, 그리고 자신의 길이 모두 다르게 생긴 것처럼, 각자의 삶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마치 골목길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는 저 사람들처럼.
태호는 창틀에 기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 작지만 선명한 빛 하나가, 오랜만에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