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집을 얻는 동안 온갖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 스스로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집주인이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꿔 할머니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것도,
모두 할머니가 자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메시지였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할머니가 준 선물이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다. 이전 두 번은 집주인이 외출 중이어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주는 처음으로 집주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집주인은 뜻밖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닌 할머니였다. 하주와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는 어색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와요. 지난번에는 내가 말을 갑자기 바꿔서 미안했어요.”
하주는 잠깐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경계심은 남아 있었다. 특히 이 집주인이라면 더욱 신뢰하기 어려웠다. 하주는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감정은 완전히 지우고, 오직 이성적으로만 판단하자.’
부동산 사장님과 집주인이 현관문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주는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벽지의 작은 흠, 가구 안쪽의 미세한 틈, 창틀의 흔들림 하나씩 꼼꼼히 점검했다.
하주의 시선이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풍경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주는 빠르게 걸어가 발코니의 방충망을 열었다. 햇살에 데워져 따뜻해진 난간의 매끈한 금속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난간을 잡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의 유리창들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전 방문 때보다 확실히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왜 이러지? 이성적으로 판단하겠다고 했는데...’
하주는 갑자기 밀려온 감정에 스스로 놀랐다. 머리를 흔들었다. 감정은 털어지지 않았다. 햇살이 스며드는 것처럼 작은 감정의 조각들이 그의 마음속 깊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집에서 참 오래 살았어요. 좋은 일이 참 많았던 집이에요. 총각도 여기서 좋은 추억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네.”
사장님의 웃음과 집주인의 말소리가 부드럽게 뒤섞였다. 하주는 무심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강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하주는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집 앞에는 작은 계곡이 있었다. 계곡에 내려가 돌을 들추면 가재가 숨어 있었다. 손으로 열심히 잡았지만, 녀석이 자꾸만 손가락을 찝었다. 세 마리쯤 잡으면 더 이상 잡기 힘들 만큼 손이 붉어지고 아렸다. 아파서 울상 짓는 하주를 보면 할머니는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하주, 고사리 손 다 찝히긋다. 어여 할매 손잡고 뒤로 온나.”
할머니는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가재를 능숙하게 잡아냈다. 할머니랑 집에 돌아올 때면 가재가 담긴 양은 주전자에서 딱딱딱 소리가 들렸다. 저녁이면 고소한 가재튀김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많이 묵고 쑥쑥 크그래이, 우리 하주.”
다정한 사투리를 쓰던 할머니의 목소리. 모든 걸 척척 해내던 투박한 손길. 계곡 위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던 햇살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것이 놀라울 만큼 생생했다.
그때 할머니는 하주의 손을 꼭 잡고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중요한 건 멀리 있지 않데이. 요래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면 끝이라. 할매는 여 집에 우리 하주만 놀러 오면 그걸로 됐다.”
어릴 땐 그저 잘 먹고 잘 크라는 뜻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하주는 할머니가 전하고 싶었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좋은 집이란 화려한 인테리어나 조건이 아니라,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기억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걸. 그렇게 오래된 기억 하나가, 하주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반짝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하주는 자신의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햇살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속에서, 이 집을 둘러싼 긴장과 불신이 서서히 풀렸다. 천천히 발코니 난간에서 손을 떼고, 다시 방충망을 닫았다. 거실로 돌아갔다. 집주인 할머니가 온화한 미소로 하주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마음을 모두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집은 잘 봤어요? 천천히 마음껏 보고 가세요."
할머니의 말은 담백했지만 깊었다. 하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 아주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진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느껴졌다.
하주는 그 집에서 나와 부동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처럼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동안 집 하나 고르는 게 참 어려웠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여긴 그냥 집이 아니었다. 앞으로 윤슬과 함께 살아갈 '삶' 그 자체였다.
사장님이 부동산 문을 열고 하주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서로 긴장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하주는 침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1,500만 원이라는 금액이 너무 컸던 것 같아요. 이번엔 호가에서 1,000만 원만 깎아주시죠. 바로 계약금 보내고 중도금도 원하시는 대로 맞출게요. 아 사장님, 이번이 정말 마지막입니다. 저도 이 조건에 안 되면 더 이상 미련 없어요.”
사장님은 하주의 눈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집주인과 통화를 시작했다. 하주는 의자에 기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의 심장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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