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부모님께 기대어 집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고, 만약 지원을 조금 해준다고 해도 그는 받고 싶지 않았다. 은퇴 준비로 바쁘실 부모님께 그런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재 살고 있는 전세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그것만큼은 하주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다. 신혼은 반드시 아파트에서 시작할 거다. 그것은 병원에 입사할 때부터 품어온 그의 목표이자, 사회 초년생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꿈이었다.
하주는 이야기를 막힘없이 써 내려가다 잠깐 멈췄다. 커서가 메모장 위에서 깜빡거렸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정작 윤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준 건 하나도 없었다. 2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제대로 된 준비도, 진지한 대화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 남자가 돼서 약속만 해놓고..."
글을 써 내려가며 지난 6년을 돌아보다 보니, 과거의 추억 너머에서 자꾸 현실이 고개를 들었다. 글이 깊어질수록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퇴사보다 먼저 해야 할 게 뭐가 있지? 당연히 결혼이겠지."
결혼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결혼을 얘기하면서 집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는 건, 행복한 꿈과 함께 부담스러운 현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주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는 윤슬과의 관계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6년간의 꾸준한 사랑을 결혼이라는 현실로 연결하려면, 그는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현실적 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맞아, 지금은 퇴사를 꿈꾸는 것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슬이와의 미래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부동산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6년의 시간 동안 만나면서 서로의 집안 사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부모님께 기대어 집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고, 만약 지원을 조금 해준다고 해도 그는 받고 싶지 않았다. 은퇴 준비로 바쁘실 부모님께 그런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재 살고 있는 전세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그것만큼은 하주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다. 신혼은 반드시 아파트에서 시작할 거다. 그것은 병원에 입사할 때부터 품어온 그의 목표이자, 사회 초년생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꿈이었다. 하주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현실적인 기반을 닦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부동산'이라는 세계, 자신에게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이기로 했다.
하주는 부동산 공부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고민만 한다고 해결책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집 근처에 있는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점 입구에서는 언제나 기분 좋은 숲 속 향기가 그를 맞이해 줬다. 모든 근심 걱정이 잊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부동산 코너로 향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초보티가 날까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열장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모두 비슷한 표지와 복잡한 제목에 하주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유독 그의 시선을 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부린이를 위한, 첫 내 집 마련- 한 달이면 내 집 마련 가능]
책 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왕초보도 할 수 있다!"라고 적혀 있었다. 마치 자신을 위한 책처럼 느껴졌다. 슬쩍 펼쳐본 내용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LTV, DTI, DSR, 고정금리, 중도상환금...] 온통 낯선 단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일단 책을 사서 공부하면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의 동그란 눈이 반짝였다. 책을 들고 당당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그날 밤, 하주의 책상에는 또 다른 종류의 책이 한 층 더 쌓였다. 그는 깊은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주방으로 갔다. 커피 머신을 켜고 캡슐 하나를 넣었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기가 그의 긴장된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따뜻한 라테를 한 잔 들고 안정된 자세로 책상에 앉았다.
첫 장을 넘기고 목차를 살펴봤다. 겉보기엔 쉬워 보였지만 막상 페이지를 넘기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하주는 노트북을 급히 열었다. 모르는 단어는 즉시 검색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유튜브 강의를 찾아보며 책을 살폈다. 처음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놀랍게도 그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낯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처럼, 어려워도 결국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하주가 집 밖으로 나갈 때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바뀌었다. 아파트 관련 앱을 열고 실거래 정보를 검색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반드시 메모장에 ‘오늘 배운 것’을 기록했다. 신규 간호사 시절 환자 매뉴얼을 꼼꼼히 복기하듯, 그렇게 메모장은 점점 두꺼워졌다. 이 과정이 그에겐 오히려 큰 위안이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배운다는 감각’에 중독되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 날 밤, 평소 자주 보던 부동산 유튜버의 말이 하주의 가슴 깊이 박혔다.
[부동산 공부는 책이나 강의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공부와 가장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실전 경험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옆에 쌓인 책을 바라봤다. 그동안 이론만 열심히 익혔지, 실제로 아파트를 보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그래, 부동산은 실전이니까. 이제 직접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다음 날, 하주는 관심을 두고 있던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입구를 지나자 부동산이 보였다. 그는 부동산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인터넷에서 매물이 가장 많다고 추천받은 부동산이었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위압감이 밀려왔다.
‘내가 어리다고 무시당하면 어쩌지?’
‘한 달 공부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지?’
‘부동산 앱에서 봤던 사장님 사진이 좀 무서웠는데...’
하주는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라는 마음과 '그래도 오늘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다투었다. 바로 그때, 다른 손님을 배웅하던 부동산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음... 혹시 집 보러 오셨어요?"
"아... 네?"
"젊은 분이 한 시간 넘게 왜 들어오질 못하고 계세요?”
“네? 아... 사실 제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요...”
“아유, 괜찮아요. 들어와서 천천히 이야기하시죠.”
부동산 문을 열자 경쾌한 종소리가 하주를 반겼다. 이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힘들었는지. 그는 첫 출근하던 신규 간호사 시절이 떠올랐다. 압도적인 소독약 냄새와 시끄러운 알람들. 부동산 안으로 들어서자 압도적인 크기의 지도와 아파트 단지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노란색 커피 믹스의 달달한 향기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하주는 진정된 마음으로 차분히 질문을 꺼냈다.
“제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데요, 혹시 괜찮은 매물 있을까요?”
사장님은 반가운 듯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긴장했던 하주도 점차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내민 메모장에는 급매로 나온 아파트 매물 정보가 선명했다.
“한번 같이 보러 가시죠.”
하주는 사장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가 처음으로 아파트 매물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하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 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나무 향과 깔끔한 페인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외부는 낡은 페인트가 벗겨진 구축 아파트였지만, 내부는 신축 못지않게 세련되고 깔끔하게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유명인의 집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이 급매라고?'
매도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사 오면서 오천만 원 정도 들여서 전체 리모델링을 했어요. 그런데 지방으로 급하게 내려가게 돼서요... 저도 여기 오기 전에 30군데 넘게 집을 봤는데, 여기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여기서 떠나지만 않았어도 최소 5년은 더 살고 싶었던 곳이에요."
하주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매도인의 말을 들었다. 집 안을 돌아볼수록 마음은 굳어졌다. 집을 나온 후 부동산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사장님이 말을 건넸다.
"어제 막 나온 급매물이라 저도 오늘 처음 봤는데, 솔직히 제 아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무조건 사줄 정도로 괜찮은 매물이네요."
하주는 다시금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집 안에서 윤슬과 함께 보내는 행복한 미래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창밖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주가 부동산을 공부한 지 한 달, 처음으로 본 매물이었다. 이렇게 쉽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30분 정도 고민한 끝에, 하주는 일단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부동산을 나왔다. 하지만 부동산 사장님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런 매물은 진짜 금방 나가요. 일주일은커녕 하루 이틀 만에 나갈지도 몰라요."
그가 부동산을 나와 아파트 입구로 걸어가는 길, 바닥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주울까 망설이는 사이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가 망설임 없이 지폐를 집어 들고 걸어갔다. 그 짧은 순간이 왠지 모르게 길게 느껴졌다.
‘역시 결정은 빨라야 좋은 걸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방금 본 아파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매물도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부동산 앱으로 아무리 검색해 봐도 이만한 가격에 이 정도 상태의 집을 찾기 어려웠다. 하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윤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슬아. 나 오늘 부동산에 다녀왔어."
"와, 오빠 정말 실행력이 장난 아니네. 그래서 어땠어?"
"그게... 진짜 너무 좋은 매물이라서, 바로 계약하고 싶을 정도였어. 그런데 슬이랑 같이 한 번 더 보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말 그렇게 좋아? 궁금하다. 그럼 우리 내일 같이 보러 갈래?"
다음날, 하주는 윤슬과 함께 다시 부동산을 찾았다. 윤슬은 모델하우스를 보는 듯 신기하고 즐거워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오빠 진짜 여기 너무 좋다. 생각보다 너무 예쁜데?"
하주는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부동산에 다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슬아, 우리 나중에 여기서 같이 살면 어떨까? 신혼집으로."
그러자 윤슬의 얼굴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하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오빠... 나 사실 아직 혼자 있고 싶은 날이 더 많아. 같이 살기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갑자기 현실이 너무 빨리 다가와서 조금 두려워졌어.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윤슬의 떨리는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조심스러웠다. 하주는 이해했지만, 마음 한편으론 서운하고 씁쓸했다. 그래도 그녀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윤슬은 이제 막 2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알았어. 만약 내가 계약을 하더라도, 언제든 네가 편하게 올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어."
하주가 윤슬을 보낸 후, 다시 부동산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윤슬이 버스 타기 전에 뭐라 했더라. 아, 이번 주말에 부모님 올라오신다고 했었지. 식사하자고도 했었나...'
하주는 잠깐 눈썹을 찌푸리다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이 집부터 어떻게든 해야 해. 이런 기회, 언제 또 올지 몰라.’
하주가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아, 네 그 집이요? 지금 막 계약하러 오신 분이 계셔서요. 잠시 후 다시 연락드릴게요."
사장님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어렸다.
"결정을 좀 빠르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사장님의 말에 하주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조했다. 여기서 주저하면 급매로 나왔다던 매물이 누군가에게 들어갈 것 같았다. 이 집보다 나은 건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동시에 병원에서 자주 듣던 말도 머릿속에서 울렸다.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 한쪽에서 행운의 여신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환상을 버릴 수 없었다.
“혹시... 어떻게 하시겠어요? "
"제가 부동산이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사장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계약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신규 간호사 시절이 생각났다. 낯선 환경에서 선배의 말을 믿고 따랐던 그때처럼, 지금도 전문가인 사장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잘 결정하셨어요. 하지만 투자는 본인의 책임이라는 거 아시죠?"
"알고 있어요. 매도인에게 계좌번호 받아주세요."
몇 분 후, 하주는 가계약금 이천만 원을 송금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주택담보대출 신청까지 마쳤다.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지만,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불안했다. 대출 신청서를 보며 다시 한번 찜찜한 기분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 걸 그랬나? 태호가 예전에 찬식쌤이 부동산을 잘 아신다고 했었는데...'
하지만 하주는 머리를 저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갑자기 연락하기도 좀 그렇지. 괜찮을 거야.'
그는 애써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하주는 그 순간까지 몰랐다. 그 작은 찜찜함이 현실로 다가올 줄을.
며칠 후,
하주는 대출 승인 연락을 기다리며 평소처럼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났을 무렵,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엔 [은행 대출상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떴다. 그는 긴장을 감추며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 네, 안녕하세요."
"하주 고객님 맞으시죠? 신청하신 대출 관련해서요... 죄송하지만 최종 심사에서 부결되셨습니다."
정적.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뇌가 하얗게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했다. 손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했다.
'... 뭐라고?'
하주는 떨리는 손으로 폰을 잽싸게 주워 다시 물어봤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미리 다 확인했었는데... 신청할 때도 이상 없다고 했었어요."
상담원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서류상 문제는 없었지만, 고객님이 신청하신 대출 상품에 소득 제한이 있는데요. 그걸 약간 초과하셨습니다."
은행에서 보내준 산정 내역서를 확인한 하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작년에 받은 코로나 특별 성과급이 문제였다. 백만 원이었다. 그 숫자가 그의 모든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아니 겨우 백만 원 초과인데... 다른 방법은 없나요? 이미 가계약까지 진행한 상태라서요."
상담원의 목소리엔 미안함과 난처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미 최종 심사가 끝나버려서요... 다른 상품으로 재신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주의 손이 떨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병원 주변이 시끄럽게 돌아갔지만, 그는 마치 깊은 물속에 가라앉은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가계약금 이천만 원만 선명히 떠올랐다.
퇴근 직후,
하주는 급하게 부동산으로 달려갔다. 부동산 사장은 상황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이 아예 없진 않은데... 대부분 어렵습니다. 매도인도 이미 다른 집 계약을 끝냈거든요. 일단 제가 한 번 설득해 볼게요.”
그 말이 위로가 되기보단 오히려 더 깊은 불안으로 다가왔다. 부동산 사장이 1시간 동안 수없이 매도인과 통화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사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더 진행하면 오히려 더 큰 손해가 날 수 있어요. 정말 마음 아프지만... 여기서 가계약을 포기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하주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와르르. 이천만 원. 2년의 적금. 윤슬과의 미래.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부동산 사장님이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다른 손님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슬의 말을 듣고 내가 좀 더 신중했다면...’
그랬다.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투자의 책임은 언제나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후회와 자책이 그를 짓눌렀다. 집으로 돌아온 하주는 소파에 힘없이 몸을 던졌다.
'도대체 나는 뭘 한 걸까?'
그 돈은 단지 숫자가 아니었다. 그의 시간이자, 노력이자, 희생이었다. 공중으로 사라졌다.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쥐어짜이듯 아팠다. 초라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견딜 수 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주는 천천히 폰을 들었다. 윤슬의 연락처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몇 번이고 반복했지만 결국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다. 실패한 건, 자신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은 윤슬과의 약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약속이, 흔들리고 있었다. 화면 위로 뜨는 자신의 얼굴. 무너진 확신을 담은 그 얼굴.
결국, 하주는 폰을 내려놓았다. 텅 빈 방 안에서 그의 숨소리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