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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멈추지 않았던 단 하나

소설연재

by 태섭
거짓말을 하면 금방이라도 들통날 것 같은,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였다. 깊고 진한 검은색의 눈동자는 마치 블랙홀 같았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다. 무서웠다. 하지만 주변의 있는 모든 빛까지 끌어 오는 듯 그의 눈은 엄청나게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했다. 이 남자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주는 요즘 독서가 꽤 효과적인 마취제라는 걸 자주 실감하고 있었다. 남궁수가 추천해 줬던 책들을 모두 구입했지만, 제대로 완독 한 건 한 권도 없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 보면 어느새 눈이 무거워졌고, 정신을 차리면 책은 가슴 위에 엎어진 채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들의 내용은 분명 좋았다. 문장도 좋았고, 질문도 깊었다. 하지만 페이지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양은 방대했고, 책상에서 점점 높아지는 책 더미는 그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책을 펼 때마다 작은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한 권이 끝나지 않으니, 다음 권으로 넘어가는 건 더더욱 힘들었다. 진도는 멈췄고, 흥미도 점점 시들해졌다.


"오늘도 책 읽고 글 써야 하는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하주는 알아챘다. 무겁다. 몸이, 머리가, 마음이 모두 돌덩이처럼 무겁다. 한 주 내내 이어진 응급실 근무는 오늘 아침이 되자 피로로 그를 덮쳐왔다. 전날 밤부터 느껴지던 잔기침은 아침이 되자 목을 칼칼하게 만들었고, 물컹하게 올라오는 두통까지 덧붙여졌다. 하주는 소파에 앉은 채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머릿속에 할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책상 위에 있는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아득히 멀어졌다. 휴대폰을 들어 SNS 아이콘을 눌러보려 했지만,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 정도는 그냥 쉬어도 되지 않을까?’


그의 머릿속엔 작은 변명들만이 속삭였다.


‘그래, 어차피 내가 하루 정도 글을 안 써도 아무도 모를 텐데.’


사실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썼던 글에도 반응은 거의 없었다. 댓글 하나, 공유 없음, 좋아요도 대체로 그의 지인들이었다. 글을 올릴 때마다 조심스레 반응을 살피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하루 이틀 사이에 자라났다. 하주는 점점 흐려지는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책도, 글도 손에서 놓은 지 벌써 한 달이었다. 이젠 돌아갈 길이 아득해졌다. 습관을 얻는 건 몇 달이 지나도 어려웠지만, 습관을 잃는 건 하루, 이틀이면 충분했다.


어느새 하주의 일상은 다시 응급실 근무와 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쳇바퀴가 되어 있었다. 지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소파 위에 그대로 몸을 던졌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리모컨을 향해 다가가다가, 탑처럼 그대로 쌓여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 한편에서 자책감이 밀려왔다.


‘아... 책 읽어야 하는데... 미치도록 하기 싫다. 또 이러고 있네 하...'


늘 그랬다. 중학생 땐 하루 한 페이지씩 단어장을 외우겠다고 다짐했지만, 일주일도 못 갔다. 고등학생 땐 하루 한 시간씩 책을 읽겠다고 결심했지만, 두어 번 하다 말았다. 성인이 된 후엔 운동, 영어, 독서, 뭐든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끝은 같았다. 끝없는 자기 합리화는 열정을 손쉽게 털어냈다.


하주는 소파에 기댄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파 옆에 던져놓은 메모장을 발견했다. 손에 들고 한 장씩 넘겨봤다. 궁금함이 자꾸만 손끝을 재촉했다.


'내가 뭐라도 해낸 적이 있었던가. 그게 기록되어 있다면, 이 안 어딘가에...'


그때 하나의 메모가 눈앞에 다시 떠 올랐다. 남궁수 교수의 말이었다.


[독서와 기록은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포기하고 싶었던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내가 바빠도 끝까지 해내고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잠깐의 침묵 끝에 사진이 한 장 눈에 띄었다. 책상 가장 안쪽에서 소중하게 놓여 있던 사진.


'윤슬'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웃었던 날, 다퉜던 밤, 그리고 끝내 함께 버틴 시간들.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꾸준함’이었다. 끝까지 노력했고, 끝까지 다가갔고, 끝까지 붙들었다.


‘그래... 내가 그토록 못 지켰던 많은 것들 사이에서, 슬이랑은 끝까지 이어왔잖아.’


하주의 입가에 미세하게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다시 묻고 싶은 마음이 따라왔다.


‘슬이랑 어떻게 6년 동안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진심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워서 더 매달렸던 걸까.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와 뭐가 달랐던 걸까?’


자신도 모르게, 그는 노트북을 열어 메모장을 켰다. 그리곤 천천히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연애 이야기라도 처음부터 써보자. 어쩌면 거기서 내가 왜 포기하지 않았는지, 꾸준함의 이유가 보일지도 몰라.'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방식이었다. 책을 읽는 것처럼,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읽어내는 일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꾸준히 하고 있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연애’라고 할 것이다. 그 꾸준했던 6년 동안의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그렇게 첫마디를 쓰고 나서 잠시 멈춘 하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떠오른 얼굴. 커다란 눈동자와 환하게 웃던 '윤슬'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환하게 채웠다.


하주가 윤슬을 처음 만난 건 간호학과 3학년 병원 실습 때였다. 처음부터 극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주와 윤슬은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남자 비율이 극히 적은 간호학과였지만, 윤슬은 간호학과 남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주 또한 군대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됐다.


어느 주말 병원 실습 멤버들끼리 술집에 모였을 때, 하주는 윤슬을 처음 보았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윤슬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그녀의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하주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화장실 다녀올게.”


윤슬이 자리를 뜰 때마다 하주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윤슬이 문 앞에서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 혹시... 저 따라오신 거예요?”


하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 좀 더 하고 싶어서..”


윤슬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시지... 화장실까지 따라오면 친구들이 괜히 이상하게 볼 수도 있잖아요."


하주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처음 본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그는 단순히 윤슬과 둘이 있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하주는 윤슬의 연락처를 어렵사리 알아냈다. 어쩌다 보니 늦은 밤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고, 또 어쩌다 보니 둘만의 술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어색한 첫 만남 이후 일주일 만에 하주는 그녀에게 고백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때부터 자꾸만 설레었어. 더 이상 숨길수가 없어서... 윤슬아, 나랑 사귀어줄래?”


그녀가 망설이는 동안 하주는 불안과 긴장으로 온몸이 떨렸다. 그는 이전 연애에서의 트라우마가 잠깐 떠올랐다. 헤어질 때마다 그에게 따라붙던 말은 늘 비슷했다. 하주야, 이제는 점점 네가 질려.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천천히, 그리고 진심으로.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엔 정말 오래가고 싶다. 제발 받아줘.'


그 순간, 윤슬은 하주의 둥글고 큰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금방이라도 들통날 것 같은,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였다. 깊고 진한 검은색의 눈동자는 마치 블랙홀 같았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다. 무서웠다. 하지만 주변의 있는 모든 빛까지 끌어 오는 듯 그의 눈은 엄청나게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했다. 이 남자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응, 좋아"


둘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처음엔 주변에 그 누구도 오래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본인들 조차 예상하기 어려웠다. 학교 전체에서 인기가 많던 윤슬과, 평범한 복학생이었던 하주. 심지어 교수들까지도 의외의 조합이라며 놀라워했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간호학과의 이상한 규칙대로 CC(캠퍼스 커플)임을 숨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하주는 윤슬의 손을 당당히 잡고 캠퍼스를 걸었고, 윤슬은 그의 옆에서 밝게 웃었다.


윤슬은 학교 기숙사에 살았다. 하주는 자꾸만 그녀를 밖으로 불러냈다. 지방 도시의 지루함을 기숙사에서 보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은 경차는 윤슬과 함께라면 지칠 줄 몰랐다. 전국을 누비며 맛집과 예쁜 카페를 찾아다녔고, 방학에는 강원도에 있는 숙식 아르바이트까지 함께 하러 갔다. 먼 여정조차 둘에겐 짧게 느껴졌다. 오히려 멀고 낯선 곳에서의 시간은 둘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4학년이 되자 그들은 서울 취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갖게 되었다. 졸업을 하더라도 절대로 멀어질 수 없었다. 서로를 독려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그 결과 서울의 위치한 대학병원에 함께 합격할 수 있었다. 하주는 3월에 먼저 입사했고, 윤슬은 7월에 입사가 결정되었다. 4개월의 떨어짐이 시작되자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주는 신규 간호사의 고된 일상 속에서 윤슬에게 전화 한 통 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퇴근 후 피곤에 지쳐 잠들기 바빴다. 윤슬은 그런 하주의 연락을 기다리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갔다.


어느 날 밤, 결국 윤슬이 울먹이며 하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6번의 자동응답메시지가 울린 후 겨우 그녀의 음성이 닿을 수 있었다.


"어.. 윤슬아. 나 또 잠들었어. 미안.. 너무 피곤해서 정신이 없었나 봐."

"오빠... 요즘 힘든 거 알지만.. 솔직히 나도 너무 힘들어.

"그래... 내가 미안해."

"왜 연락도 없고... 나는 맨날 기다리기만 해야 돼?"


하주는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미안해 슬아..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진짜 미안해.”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불안이 둘을 동시에 덮쳤다.


윤슬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거리를 무시하고 매주 서울로 올라왔다. 왕복 여섯 시간을 걸려 와도 그녀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세 시간도 못 보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따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노력 덕분에, 하주는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 둘은 다시금 서로에게 깊이 기대고, 더욱 소중히 여겼다.


둘이 만난 지 정확히 4년이 되던 날, 하주는 서울 잠실의 최고층 호텔을 예약했다. 윤슬은 호화로운 제안에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그날 오후 3시, 체크인하고 방 문을 열었을 때 윤슬은 실망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프러포즈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장미꽃과 풍선, LED 촛불로 꾸며진 방의 입구가 윤슬을 맞이했다. (찰나의 시간 동안 태호와 상혁이 하주의 프러포즈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손을 잡고, 반짝거리는 꽃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방 한가운데 통유리 앞에는 "Marry Me?"라는 풍선이 달려져 있고, 1,000송이의 장미와 커다란 박스, 그리고 자그마한 박스가 테이블에 예쁜 장식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면에선 Perhaps의 "사랑인가요" 노래와 함께, 둘만의 추억이 담긴 영상이 흘러나왔다.


윤슬은 방 한가운데 장식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영상을 감상했다. 그들의 4년간의 연애 순간들을 보며 처음에는 웃었지만, 점점 지날수록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영상이 끝나고 하주가 윤슬에게 다가갔다. 그는 윤슬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꺼내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레 끼워줬다.


“나랑 결혼해 줄래?”


윤슬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윤슬의 대답은 하주의 눈동자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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