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낯선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예전엔 언제나 답이 먼저 떠올랐으니까. 공부를 하면 좋은 학교에 가고, 열심히 하면 좋은 직업을 얻는다. 그게 정답이라고 믿었다. 아니, 정답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간호사가 되었을 땐 기뻤다. 목표를 이뤘다는 뿌듯함도 성취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정답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서점에 왜 왔지?'
하주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새로 나왔다는 커피 원두를 사러 나선 길이었다. 근무가 없는 날, 조금은 여유를 부려보자며 나온 산책이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였을까.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향기가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커피 향도, 꽃 향도 아닌데... 이상하게 안온하고, 자꾸만 마음을 끌어당기는 향기.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에스컬레이터 위, 2층 서점 입구에서부터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마치 익숙한 기억이 몸을 이끄는 것처럼, 정확히 그 방향으로 몸이 기울었다.
'이 향기... 어디서 맡아봤더라.’
마치 예전부터 자주 왔던 곳,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 하지만 하주는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서점에 들렀던 날이 언제였는지도.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 조용한 숲 속 같았다.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책과 책장들,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감도는 공기. 그리고 낮게 깔린 음악이 공간을 감쌌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향기는 더욱 짙어졌고, 하주는 저항 없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 의도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향기를 따라왔을 뿐. 하지만 그의 걸음은 한 권의 책 앞에서 자연스럽게 멈췄다.
[살아내는 마음 - 남궁수]
하주는 손을 뻗어 책을 들었다. 표지를 손끝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거친 종이 질감 위로, 제목의 양각 글자가 느껴졌다. ‘살아내는’ 그 네 글자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왜 이리 익숙하고... 또 왜 이리 아픈지. 손끝을 지나 가슴 쪽으로 스며들었다. 게다가 그 저자 이름 남궁수 작가, 아니 남궁수 교수다. 하주와 같은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는 교수님. 그러나 거의 업무적인 이야기만 나눴던 사람. 그의 이름이, 책표지 위에서는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책장을 넘겼다. 한 장, 두 장. 딱히 어디부터 읽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그냥 펼쳐진 페이지를 눈으로 따라갔다. 어느 순간 하주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책이 아니라, 책 속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서점 안엔 여전히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하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만 점점 빨라졌다. 이 페이지가 아니라면 다음 페이지엔 답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답은 어디에 있는 거지? 뭐 어떻게 살아내라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짜증 섞인 목소리가 올라왔다. 그때였다.
“손님, 읽으시려면 저기 앉으셔도 돼요.”
하주는 서점 직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책을 품에 꼭 안았다.
‘그래, 조금만 더 읽어보고 괜찮으면 구매할 거니까.'
책 속에 내용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들. 그 안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직업을 살아내고 있나요, 아니면 삶을 살아내고 있나요?]
그 문장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를 툭 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버린 것처럼. 누군가가 그의 삶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듯했다. 여전히 정답은 없었지만, 무언가가 안에서 보일 듯 말 듯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낯선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예전엔 언제나 답이 먼저 떠올랐으니까. 공부를 하면 좋은 학교에 가고, 열심히 하면 좋은 직업을 얻는다. 그게 정답이라고 믿었다. 아니, 정답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간호사가 되었을 땐 기뻤다. 목표를 이뤘다는 뿌듯함도 성취감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엔 정답이 없다. 그게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 밤, 하주는 남궁수 작가의 책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정주행을 할 때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몰입했다. 넷플릭스에 버금가는 몰입감이라니 스스로도 놀랐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 머릿속엔 남궁수 작가의 문장들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고막에 울리는 저음처럼, 깊고 묵직하게 남았다.
며칠 뒤, 하주는 응급실 한편에서 환자들의 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남궁수 교수 아니 남궁수 작가가 하주 옆으로 지나갔다. 유독 조용한 걸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는 습관적인 배려. 전에는 그저 ‘잘 나가는 교수’로만 보였던 사람이, 조금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순간 하주는 말을 걸고 싶어졌다. 입술을 떼기 직전, 목 아래로 무언가 꿀꺽 삼켜지는 걸 느꼈다. 질문이 아니라, 긴장이었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다행히 책상 아래여서 아무도 알아채진 못했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말은 평범해야 했다. 그래야 들키지 않는다.
“교수님.”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응? 무슨 일 있어요?”
남궁수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아, 환자 얘기는 아니고요...”
남궁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네. 무슨 질문이죠?"
“제가 요즘 책에... 조금 관심이 생겼거든요. 혹시... 작가님으로써 좋아하는 책... 하나만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말을 꺼낸 뒤 하주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걸까. 책 속의 그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내가 팬인가? 아니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괜히 속으로 혼잣말을 반복했다.
남궁수가 하주의 눈을 바라보다가 반갑게 입을 열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있어요?”
“아! 자기 계발서 위주로 보고 있었어요. 요즘 병원 생활이 힘들어서 뭔가 바꾸고 싶어서요!”
“음... 자기 계발서라.”
남궁수는 잠시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가 다시 하주를 바라봤다.
“그래, 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
그는 대답을 미루었다. 바로 무언가를 추천하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근무의 마지막쯤 하주를 다시 불렀다.
“하주쌤, 여기 저 잠깐만 봐요.”
남궁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서점 홈페이지를 열었다. 조용한 진료실 한켠, 모니터 화면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빛은 아무 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 다정한 말투, 옅은 수염이 있는 마른 턱선, 그리고 주름 하나 없이 다려진 흰색 가운. 그는 정장보다도 가운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늘 바쁘게 응급실을 오가던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주는 괜히 숨을 들이쉬었다. 눌린 가슴이 조용히 퍼졌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선 것 같았다.
컴퓨터 화면에 책 제목이 하나씩 타이핑되어 나타났다.
‘한강’ (잠시 멈춤)
‘김훈’ (다시 멈춤)
‘양귀자’ (다시 멈춤)
‘황보름’ (다시 멈춤)
‘김호연’ (다시 멈춤)
‘장대건’ (다시 멈춤)
‘김애란’ (다시 멈춤)
‘스토너’ (다시 멈춤)
‘월든’ (다시 멈춤)
... 마지막 ‘삶과 죽음’.
하나씩 제목이 뜰 때마다 하주는 숨을 참았다.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는 열쇠가 하나씩 놓이는 느낌이었다.
"교수님 저는... 이거 다 처음 보는 책이에요."
"저는 다 읽어봤어요. 어떤 건 수 십 번도."
"그런데 이 중에 자기 계발서는 하나도 없네요." 하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궁수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누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 저는 잘 안 믿어요. 그래서 평소 자기 계발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죠. 병원에서 일하면서 누가 정답을 알려주면 그게 정말 도움이 되었나요? 결국은 자신이 판단해야죠. 책도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던지는 책이 좋아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해보게 만드는 책."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직업을 살아내기 위해 책을 읽는다면, 결국 삶에 대한 방향과 좌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건 각자 개인마다 다를 거고요.”
“네... 그래서 추천해 주신 거군요.”
“물론 정답은 없겠죠. 다만, 방향이란 답이 아니라 질문에서 나오는 거예요.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남들이 정한 방향으로 밀려가게 돼요.”
하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잠시 교수의 얼굴을 지나 하얀색 불빛이 펼쳐진 진료실의 벽 끝에 머물렀다. 매일 봐왔던 평범한 공간이, 갑자기 낯설고도 서늘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익숙하게만 느껴졌던 공간과 시간이, 사실은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삶의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겨우 그 말만 뱉을 수 있었다. 마음 어딘가에서 작고 희미한 불빛이 천천히, 조금 더 분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하주가 노트북을 켰다. 검색창에 나타난 이전 기록인 [퇴사하는 방법]을 지우고, [독서]와 [글쓰기]를 쳐봤다. 빙산의 일각 이었다. 분명 안다고 생각한 것들인데, 몰랐던 부분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신기하게도 독서를 많이 하다가 퇴사를 한 사람도 있었고, 글쓰기를 통해 직장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글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강연도 했고, 자연스레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런 것들을 보니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 교수님 말처럼 정답은 없어. 각자만의 방향이 있을 뿐. 내 방향은 어디가 맞을지 스스로 질문해보자.'
하주는 조용히 창문을 열고, 도시의 밤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메모장을 켰다. 자신이 생각했던 질문들을 적어봤다.
[하주의 인생 노트]
나는 직업을 살아내는가, 삶을 살아내는가?
나는 어떤 질문을 내게 던져야 할까?
나는 어떻게 기록하며 살고 싶은가?
기록은 감정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글을 쓰는 일도, 어쩌면 본인을 살아있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될지 않을까? 하지만 머릿속엔 한 가지 불안이 스쳤다.
‘이런다고 정말 바뀌는 걸까? 내가 감정에 취해서 흘러가는 건 아닐까?’
그는 그런 의심도 함께 적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노트는 남을 위한 게 아니니까. 하주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키보드를 눌렀다.
다음날 아침,
하주가 출근 전 30분 시간을 내어 다시 책을 펼쳤다. 교수님의 음성이 안에서 맴돌았다. 버스를 탔는데도 그의 음성은 떠나지 않았다. 안내 방송으로 많이 들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응급의학과 교수 남궁수 입니다. 여러분, 환절기 감기 조심하고 계신가요? 사라졌다고 알고 있던 코로나가 다시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가장 쉬운 대처법인 손씻기. 모두의 건강을 위해 잊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오늘 하루도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모두 건강한 삶을 살아내봐요! 이상으로 명예서울시장 남궁수 였습니다."
교수님은 직장 뿐만 아니라 밖에서까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하주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문득 SNS 계정을 하나 만들었다. 자신도 어쩌면 작지만 선한 영향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닉네임은 [남의간호]
첫 게시물은 어색하고 짧았다.
"(중략) 오늘 하루, 뭐라도 했으니까... 살아낸 거겠죠."
업로드 버튼을 누르기 직전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안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질문이었다.
‘그래, 의미는 내가 만들어가는 거지.’
아무도 읽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일단 부담감은 없을테니까. 하주는 눈을 감고 버튼을 눌렀다. 그의 심장이 작게 뛰었다.
‘이제 조금은 다르게 살아보자.’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