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어쩌면 병원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누군가는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카페에서, 누군가는 회식자리에서, 나처럼 지쳤다고 말하지 못한 채 하루를 버티고 있을 거야.
하주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보통 알람보다 먼저 깨는 일은 짜증스러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마치 오래간만에 건전지를 전부 갈아 끼운 것처럼, 몸이 의외로 가벼웠다. 몇 주째 짓누르던 피로가 오늘만큼은 조금 걷힌 듯했다. 창문 틈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지만 기분 좋은 눈부심이었다. 하주는 침대에서 잠시 이불 향기에 몸을 맡겼다. 포근하고 안온했다. 이상하게 출근하는 날이면 이불속 향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유는 몰랐지만, 침대를 벗어나기 어려워지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예정된 알람이 울렸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졌던 일상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물 한 컵을 마신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현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사실 운동을 마음먹기는 쉬워도, 막상 문 밖으로 나가는 게 어려웠다. 하주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작은 핑계를 만들었다.
'그냥 스트레칭만 하고 오자.'
헬스장에 도착한 그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도 높은 운동을 하고 있었다. 결국, 스트레칭은 자신을 속이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운동이 진행될수록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운동을 마친 하주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긴장된 근육을 풀었다. 천천히 몸에 흡수되는 느낌이 좋았다. 양손으로 몸을 만지니 울퉁불퉁 펌핑되어 있었다. 부쩍 좋아진 몸 상태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샤워를 끝낸 후 머리를 말리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눈동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안경을 써온 그에게 라식은 신의 한 수였다. 큰 눈동자가 더욱 선명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둥근 눈을 가진 남자의 활력은 무궁무진해 보였다. 하주는 그 활력을 아낄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아점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두부를 꺼내 사등분했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들기름을 팬에 둘렀다. 네모나게 자른 두부가 노릇하게 익자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닭가슴살 샐러드를 곁들이자 완벽해졌다. 그에게 식사는 간단하면서도 단백질만 충분하다면 그만이었다.
식사 후 커피를 내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 맛이 좋았다. 사실 커피 맛을 섬세하게 구분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아.'
하주는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출근의 피곤함은 잠시 잊은 채, 그의 발걸음에는 오랜만에 느끼는 가벼움과 희미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병원에 도착하고 응급실 자동문이 열렸다. 동시에 요란한 엠블런스 사이렌 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주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 소리는 매일 듣는 소리였지만, 들을 때마다 속이 먼저 긴장되었다. 그리고 자동문이 닫히는 찰나, 출근 전 평화로웠던 순간이 뒤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30대 남자, 음주 후 복통 호소합니다!”
“119 이송 환자, 지금 BP(혈압) 60대, 의식 semi-coma(반-혼수) 상태예요!”
“여기, 환자 IV 뽑고 난동 중이에요! 지금 강쌤 얼굴 맞았어요! 보안요원 호출 좀 해주세요! ”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 빠르게 교차하는 발소리, 익숙한 알림음과 장비음이 사방에서 터졌다. 하주는 파란 유니폼을 고쳐 입었다. 단추 하나를 다시 잠그며 마음을 정돈했다.
‘그래, 여긴 절대 조용할 수 없는 곳이야.’
그는 바로 업무에 들어갔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그려졌다. 응급 처치가 필요한 환자, 신체 보호가 필요한 환자, 초진기록이 필요한 환자까지. 우선순위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빠르게 움직이던 그의 귀에 낯익은 말투가 스쳤다.
“아이고 이 병원은 왜 이리 덥노. 거 남자 선생, 요 이불 좀 걷어도 되제?”
하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억양, 그 어투. 너무도 익숙했다.
“... 어머니 혹시 고향이... 경상도세요?”
“맞다. 내 안동 아지매 아이가. 서울 산 지도 반 백 년이 다 돼삣는데, 티 나니껴?”
하주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신의 할머니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저도 고향이 안동이에요! 저희 할머니도 안동 분이시거든요. 말투랑 모습이 꼭 닮으셨어요."
“맞나! 그라모 내 니 할매지 뭐. 아이고 야야... 이렇게 와가꼬 힘든 사람 챙겨줘서 고맙데이.”
옆에 앉아 있던 보호자, 딸이 덧붙였다.
“아 선생님도 안동 분이세요? 엄마가 요즘 많이 허약해지셨는데... 고향분 만나서 다행이네요.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주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의 말투와 태도는 바쁜 와중에도 마음을 풀어주는 순간이 되었다.
얼마 후,
할머니가 복부를 움켜쥐며 신음을 냈다.
“선생님!! 여기 좀 봐주세요! 저희 엄마가 조금 이상해요. 갑자기 눈을 안 떠요.”
하주는 곧바로 혈압계를 다시 장착했다. 숫자는 78/40. 저혈압 상태였다. 담당 교수에게 바로 상황을 알렸다.
"교수님, 8번 침상 환자 혈압 떨어졌습니다. 78에 40입니다. 의식도 조금 흐릿해지셨어요."
교수는 빠르게 판단했다.
"일단 NS 1리터 풀드립 시작하고, 노르에피네프린 1 마이크로그램 퍼 아워로 정맥 투여 시작하세요."
하주는 팀원들과 함께 약물 투여를 준비했다. 주사를 새로 잡고, 승압제를 투입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치를 확인했다. 85, 91, 105... 숫자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의식도 다시 맑아졌다.
“아이고 마, 요래 사는 게 고마운 기라.”
그 말에 하주는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상태가 호전되고 스테이션에 앉아있던 하주에게 보호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커다란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커피와 빵이 가득했다.
“응급실 선생님들 모두 고생 많으신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감사합니다. 정말.”
하주는 계속 마음만 받겠다고 하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침대에서 그 모습을 본 할머니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내 손주 같으니까 꼭 받으라는 사투리가 멀리서도 쏙쏙 박혔다. 그는 마지못해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안도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퇴원 준비를 하던 중, 할머니의 혈압이 소폭 떨어졌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호자의 눈빛은 불안으로 가득 찼다.
“선생님... 혹시 입원은 어려울까요? 엄마 혼자 집에 계시면 걱정이 돼서...”
하주는 잠시 생각했다. 할머니는 이미 퇴원처리가 진행된 환자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입원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오늘 입원 병상이 더 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주가 할머니와 보호자에게 조심스레 설명했다.
"입원을 원하셔도 이미 퇴원처리가 나서 어려울 수 있어요... 게다가 현재 입원 병상이 부족해서요..."
그는 동그란 눈을 약간 줄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신 교수님이 퇴원약으로도 충분히 조절 가능하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오늘 약 반응도 좋으셨고, 상태도 비교적 회복되셨으니까요. 아마 다음 외래 예약 때 오셔도 괜찮을 거예요."
하주는 다시 한번 자신 있게 말했다.
"정말 괜찮으실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보호자가 그제야 불안했던 표정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주쌤 여기 3번 환자 Siezure(경련)해요!”
순간 그의 머리가 번쩍였다.
“에어 웨이부터 바로 입 안에 넣으세요. 산소도 주세요. 당장 교수님께 노티 하러 갈게요.”
급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위급상황이 일상이었지만, 언제나 침착 해야했다. 응급실에선 결코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그 사이, 퇴원하는 할머니와 보호자의 뒷모습이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미 다음 환자의 경련 처치에 몰두한 채였다.
퇴근 전,
하주는 한참 전에 보호자가 건넸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이번에는 커피 맛이 쓰기만 하네... 뒷맛이 뭔가 찝찝해.”
왜 이토록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닌지. 찝찝한 기분이 그의 입안에 계속 맴돌았다. 병원 밖은 벌써 어두워졌다. 별은 없었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음날 오후,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요동치는 기계음과 함께 들것이 밀려 들어왔다. 주황색 옷에 피가 묻은 구급대원이 숨 가쁜 목소리로 외쳤다.
"70대 여성 환자, 자택에서 심정지 발생했습니다! CPR 15분째 진행 중입니다!"
하주는 반사적으로 초진 차트를 움켜쥐고 환자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응급처치 팀이 이미 심폐소생술을 이어가고 있었고, 자동제세동기의 전극이 환자의 가슴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침대 위, 산소마스크에 가려진 얼굴. 흰 피부. 얇은 눈꺼풀.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가슴. 그리고 희미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말이 떠올랐다.
‘아이고 마, 요래 사는 게 고마운 기라.’
그 순간, 하주의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한 박자 빠르게 고동쳤다.
“엄마! 엄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엄마!!!”
보호자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응급실을 가로질렀다. 하주는 고개를 돌려 소리의 출처를 확인했다. 그 순간,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안동 할머니의 딸이었다. 슬픔과 공포, 그리고 충격이 순식간에 보호자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얼굴은 곧 분노로 일그러졌다.
“당신이야! 당신이 괜찮다고 했잖아! 당신이 우리 엄마를 죽였어! 네가 다 괜찮다고 했잖아!”
말끝마다 칼날처럼 날아온 문장들이 하주의 가슴을 정면으로 찍어냈다. 그 순간, 모든 소음이 차단됐다. 삐삐 거리는 기계음도, CPR 리듬도, 동료의 지시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체가 음소거된 듯한 정적 속에, 하주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하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전날 퇴원 오더를 냈던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담당교수는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다시는 자신의 방향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주가 몇 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호자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흔드는 걸 가만히 견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혁이 급히 다가와 하주와 보호자 사이를 막았다. 보호자는 팔을 휘젓고 울부짖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 돌려내! 네가 분명 괜찮다고 했잖아! 믿었단 말이야! 네가 죽였어! 네가 죽였다고!”
보호자와 떨어진 하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들것 위에 누운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얇은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고, 입술은 떨림조차 없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내가...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을 거라고 믿었는데...’
의료진은 최선을 다했다. 가슴압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전기 충격도 세 차례 가해졌다. 하지만 결국 모니터에 뜬 심전도는 평평한 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끝내 할머니는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교수가 보호자들을 불렀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한 원인을 설명한 이후 사망선언을 했다. 보호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피우지 않았다. 사건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하주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상황이 겨우 정리된 뒤, 그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조용히 탈의실로 향했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울이 달린 금속 벽에는 창백한 그의 얼굴이 비쳤다. 멍한 눈동자, 잔뜩 굳은 입술. 그의 숨소리는 거칠고 빠르게 흘러나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그 누구보다 할머니를 진심으로 챙겼는데..."
하지만 다음 생각은 더욱 날카로웠다.
‘정말 최선이었나? 혹시 내가... 조금만 더 강하게 입원을 주장했더라면? 교수님에게 한 번만 더 말씀드렸다면? 과연 내 가족이었어도 그렇게 보냈을까?’
숨이 막혔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조여왔다. 뭐지? 왜 이러지?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머리로는 병원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가슴은 그렇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의 몸 컨디션은 충전도, 교체도 안 되는 방전 상태가 되었다.
'이게 정말 내 잘못일까, 아니면 내가 선택한 직업의 본질적인 한계일까? 정말 나는 사람을 살릴 자격이 있는 걸까? 아니, 나는 진짜로 누군가를 살린 적이 있긴 했나?'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감정은 결국 무너졌다. 턱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하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 탈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 울음은 조용했지만, 무겁고 진득했다. 무너짐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형태를 한다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캄캄했던 그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함께 근무하던 상혁의 메시지였다.
[상혁 : 하주야, 아까 보호자분 가셨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진짜 너 잘했어. 넌 항상 최선을 다하잖아.]
하주는 휴대폰을 조용히 내려놓고, 흐릿한 눈으로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어쩌면 누군가는 알아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눈물 뒤에 남는 허기 같은 감정이 남았다. 잠시, 아주 잠시,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깊이 내쉬었다.
인계 시간은 오늘도 찾아왔다. 하주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집까지 걷기로 했다. 평소라면 버스나 자전거를 타야 할 먼 거리였지만, 오늘은 꼭 걸어야만 할 것 같았다. 빠른 걸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느릿느릿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그들도 어딘가 무겁고 지쳐 보였다. 오늘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집안은 캄캄했다. 하주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시계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한동안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있었다. 긴 하루가 끝나고, 이제는 진짜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 뒤, 그는 천천히 움직였다. 책상 위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잠시 망설였다. 한참 동안 커서만 깜빡이다가 마침내 검색창에 천천히 글자를 입력했다.
[간호사 퇴사 후 할 수 있는 일]
검색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수많은 글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런 검색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그 순간, 하주의 심장이 묵직하게 뛰었다.
‘이제, 정말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도 몰라.’
먼저 간호사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다양한 곳에서 일하는 간호사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학교 보건교사 되신 분 있나요? 현실적인 후기 부탁드립니다.]
[미국 간호사 취업, 한국 간호사 출신으로 1년 만에 성공 가능합니다.]
[간호사 면허 및 경력을 활용해서 병원 밖에서 할 수 있는 직업 리스트 공유해요.]
[병원 간호사 그만두고 작은 카페 창업한 후기.]
이번엔 직장인들의 적나라한 고민과 현실적인 경험담이 오가는 사이트를 클릭했다. 화면을 스크롤 할 때마다 다양한 글들이 쏟아졌다. 그중 몇 가지 글의 제목이 눈에 박혔다.
[퇴사 2개월 차인데, 생각보다 현실 쉽지 않음.]
[퇴사 충동 오지만 진짜 준비부터 하고 해야 함. 감정적으로 움직이면 100% 후회함.]
[직접 겪어보니 직장 밖은 야생 그 자체임. 감성적으로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준비한 후 퇴사 하는 걸 추천.]
글 하나하나가 하주의 눈동자를 흔들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면서도, 손끝이 자꾸 식은땀이 났다. '퇴사'라는 단어를 화면에서 보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는 흔들림 뒤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병원 밖에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어쩌면 병원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누군가는 회의실에서, 누군가는 카페에서, 누군가는 회식자리에서, 나처럼 지쳤다고 말하지 못한 채 하루를 버티고 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제 위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주는 지금 진짜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 화면 아래쪽에서 작은 알림창 하나가 천천히 나타났다.
[당신의 직장 고민을 나누어주세요.]
하주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였다. 클릭한 뒤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갔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만둬도 될지... 진지하게 퇴사가 고민됩니다.
병원을 떠나면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글을 올린 뒤 그가 자주 쓰던 인생 노트를 펼쳤다. 오늘 날짜에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퇴사 준비]
그 후 책상에서 눈을 떼자, 방 안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잠시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하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천천히 커튼을 젖혔다. 창밖에서 달빛이 조용히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부드럽고 차가운 빛이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커피 머신에 물과 캡슐을 넣었다. 그가 중얼인 건 하루에 대한 평이었는지, 자신에 대한 혼잣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익숙한 손짓, 눌리는 버튼, 졸졸 흐르는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향과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