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코인은 떨어졌고, 통장은 텅장처럼 보였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뭔가를 진심으로 해봤다는 사실만은 남았다. 실패는 그 안에 은근한 짜릿함과 강력한 고통, 그리고 경험만이 남는다.
퇴근 후
임하주는 도림천을 따라 자전거를 달리며 ‘오늘도 살아냈다’고 말했지만, 오상혁은 결제창을 보며 말했다.
"오늘도 질렀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설레는 결제를 마쳤다. DJI 오스모 포켓 3(액션캠). 834,000원. '지금 결제 시 내일 도착!'이라는 문구는 그에게 삶의 목적처럼 빛났다. 더 이상의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이었다.
상혁은 탈의실에서 태호에게 들은 말이 자꾸 머릿속에 남았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상해서 태호에게 지지 않으려고 무조건적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태호의 말은 100% 틀리지 않았다. 남자 나이 서른 하나쯤 되면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너는 아직도 그런 헛소리에 인생 걸 거야?, 현실 좀 봐. 여기보다 좋은 데 없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상혁은 자꾸 오기가 생겼다. 상혁이 흔히 받는 오해 중 하나는 자기주장이 조금 강하고 철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건 상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상혁은 자기주장이 '매우' 강했고, 철이 없는 게 아니라 인생의 '재미'를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현실? 현실이 뭐 어쨌다고. 그렇게만 살면 인생 재미없잖아."
그래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나는 도대체 뭘 할 때 제일 재밌었지?’
그때 문득 떠올랐다.
[유튜브]
상혁은 아침에 일어나면 유튜브로 시작해서, 자기 전까지 유튜브로 끝나는 사람이다. 뉴스도 유튜브, 운동도 유튜브, 혼밥 할 때도 유튜브, 심지어 화장실 가서도 '시원하게 잘 싸는 법'을 유튜브에서 찾아본 적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유튜브를 안 써본 사람이 없잖아? 그만큼 재미있고 사람이 많다는 건, 돈도 많이 몰린다는 이야기잖어. 나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나만큼 유튜브를 많이 보고, 어떤 게 재밌는지 아는 사람도 많이 없기 때문이지. 게다가 나는 낯선 사람한테도 말을 잘 거니까!"
이래서 나온 상혁의 첫 콘텐츠는 '직장인 거리 인터뷰'
제목은 [솔직히, 연봉 얼마 받으세요?]였다.
요즘 콘텐츠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을 원했고,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건 그가 제일 잘하는 거였다. 거기에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돈 얘기까지 나오는데, 이건 무조건 '조회수 폭발 각!'이었다. 유튜브 채널 이름은 생각처럼 쉽게 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충 [상혁 TV]로 저장했다. 그의 좌우명 '심플이즈베스트'처럼 단순한 게 최고였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업무지구를 생각해 봤다. 3대 업무 지구라 불리는 '강남', '시청', '여의도' 그곳에 직접 가서 직업별, 연차별, 나이별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는 대본을 만들면서 너무 흥분되었다. 이미 성공했다는 생각에 희망이 부풀어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로켓배송으로 주문했던 카메라가 도착했다. 포장을 뜯자마자 상혁은 혼잣말했다.
"내 인생 첫 방송국이다!"
카메라를 들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인사를 연습했다.
“안녕하세요, 오상혁입니다. 오늘은... 아니, 너무 딱딱하다. 혁하이~ 안녕 여러분! 오늘은 직장인 연봉을 탈탈 털어보는 시간입니다~”
오후 1시, 강남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우르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쏟아져 나왔다. 상혁은 긴장한 얼굴로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첫 번째 타깃에게 쭈뼛쭈뼛 다가섰다.
"안녕.. 하세요? 혹시 인터뷰 1분만 괜찮으실까요?"
"... 무슨 내용이죠?"
"그냥 간단하게 직장, 연차, 연봉 정도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지나갔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
하지만 네 번째.
드디어 성공했다.
"어떤 일 하세요?"
"세무법인 다녀요."
"초봉은 어느 정도였어요?"
"5,800쯤이요. 왜요?"
"아 그냥, 궁금해서요. 유튜브 찍고 있거든요."
"네? 이거 얼굴은 안 나오는 거죠?"
"네네! 절대 안 나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영상 촬영 버튼을 깜빡해서 해당 인터뷰 내용을 저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괜찮았다. 어쨌든 첫 성공 후 자신감이 붙었다. 이제는 더욱 당당하게 사람들한테 다가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 또한 더 당당해졌다.
"초면에 좀 실례이지 않나요?"
"이거 까도 돼요?"
"나무아미타불."
"젊은이가 눈이 아주 선해 보여요. 혹시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요?"
어떤 여자가 갑자기 상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으로 말을 걸어왔다. 순간 어리둥절하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도는 안 믿어요!"
상혁은 여자에게 잡혔던 손을 뿌리치고 잽싸게 도망쳤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주위를 둘러봤다. 정장을 멋지게 빼입은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딱 한 명만 더하자. 상혁은 열 번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가 갑자기 불쾌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아니, 젊은 사람이 남의 연봉을 묻는 게 예의인가요? 이거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거예요?"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상혁은 얼굴과 목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 죄송합니다. 그냥 재미로... 아니 취준생을 위한 유튜브 자료로..."
남자는 말을 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뭐? 내 얼굴 찍었어요? 지금 당장 지우세요."
순간 상혁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 아니요! 찍지 않았어요. 진짜예요."
급하게 말을 거느라 이번에도 촬영 버튼은 누르지 못한 상태였다. 남자가 재차 확인을 하고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날카로운 말만 남긴 채, 정장 입은 남자는 멀어져 갔다. 상혁만이 그 자리에서 씁쓸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엔 진짜 무서운 사람들이 많구나.'
그는 카메라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웃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정작 웃긴 건 자기 인생 같았다. 유튜브를 볼 때는 정말 즐겁게 봤지만 직접 해보니 쉬운 게 아니었다. 세상 모든 유튜버들에게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이건 재미가 아니라, 중노동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영상 편집에 들어갔다. 유튜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어도비 프리미어프로' 이것 또한 사용하려면 결제를 해야 했다. 1달 구독, 1년 구독이 있었다. 그의 의지는 강했다. 1년 구독 버튼을 눌렀다. 그 후 찍어왔던 영상들을 넣고 편집을 시작했다.
그러나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은 상혁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듯 복잡했다. 한 시간 넘게 작업한 영상이 프로그램 오류로 꺼져버렸다. 상혁은 망연자실했다.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프로그램을 켰다.
'진짜 사람 미치게 하네. 이게 다 이런 식인가? 유튜버들 진짜 존경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조작법과 단축기 때문에 또 한 시간 동안 헤맸다. 상혁은 유튜브 편집법을 또 유튜브에서 배웠다. 세 시간이 지나고 겨우 영상 하나가 완성되었다. 편집된 영상은 단 30초. 영상 속 담긴 건 오프닝 멘트 후 가벼운 인터뷰, '다음 주에 만나요' 밖에 없었다.
편집을 끝내고, 노트북을 닫았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다시 노트북을 열고 ‘유튜브 성공 스토리’를 검색했다. 화면에는 수많은 성공담들이 넘쳐났다. 상혁은 어딘가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이렇게 쉽게 잘하는데, 나는 왜 이러지? 유튜버도 결국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건가?'
마음 한구석에서 작지만 분명한 아쉬움이 피어올랐다. 사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장비도 사고, 편집 프로그램 1년 구독까지 끊었는데, 이렇게 빨리 포기해도 되는 걸까? 화면에 비친 자신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다시 노트북을 닫았다.
멋쩍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로도 충분히 경험이야. 아쉽지만 빨리 손 떼는 게 맞는 거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마음을 달랬다. 다음 도전은 반드시 시간 효율성이 좋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잠까지 설칠 일은 없어야 했다. 그는 곧바로 편집 프로그램 환불 신청을 알아봤다. 카메라는 당근마켓에 중고 매물로 올렸다.
[급매] DJI 오스모 포켓 3(액션캠), 딱 한 번 사용함. 거의 새것.
다음 날, 상혁은 병원에 출근해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때 탈의실 문이 열렸다. 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옆 부서 선배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으며 들어왔다.
"필승! 상민이 형,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오! 상혁! 나 다음 달에 유럽 간다.”
“엥? 며칠 동안요? 거기 가려면 길게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그래서 나 100일 다녀오려고."
"휴가가 그렇게 길게 나와요?"
“아니, 간호부에 말했지. 안 보내주면 그냥 그만둔다고.”
상혁은 코웃음을 쳤다.
"에이, 행님이 무슨 부자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생각하세요. 말이 돼요? 어떻게 갑자기 그만둬요."
"상혁아. 너 전역했을 때 우리 같이 술 한잔 거하게 했잖아. 그때 샀던 비트코인 생각나냐?"
"음... 그게 언제죠? 아! 8년 전인가? 뭐야 그거 꿈인 줄 알았는데! 행님 그때 아르바이트비 받았던 거 다 넣었죠?"
"어어, 나도 그때 술 왕창 먹고 기억 잃어버려서 몰랐어. 근데 저번달에 우연히 들어가 봤는데, 그게 3억 되어있더라."
그 말을 듣고 상혁의 눈에는 바로 불꽃이 튀었다.
"네? 3억이요? 그게 말이 돼요?"
"그래 인마. 언제 우리 인생에 말이 되는 일이 있었냐. 근데 너도 그때 조금 샀었지 않아? 어쨌든 형님은 먼저 간다. 오늘도 일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해라~"
상혁은 옷을 반쯤 걸친 채로 곧바로 코인 거래앱을 다운로드했다. 휴면계정을 해제하고 들어가니, 계좌에 빨간색으로 +1,600% 수익률이 찍혀 있었다.
[잔고 : 847,000 원 (+1,600%)]
"와 그때 나도 오만 원 정도 넣었었구나!"
상혁은 번뜩 생각했다.
‘맞아. 이번엔 무조건 간단한 거야. 인터뷰도 필요 없고, 편집도 필요 없어. 그냥 돈 넣고 지켜보는 거니까. 시간 따로 안내도 되잖아! 상혁아 드디어 찾았다. 바로 이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박이었다. 그동안 모아뒀던 돈도 좀 있고, 지금처럼 일 하면서도 할 수 있고, 인터뷰 같은 거 안 해도 되고, 심지어 자면서도 돈이 들어왔다. 이건 상상 이상으로 벌써부터 재밌었다. 현실적인 재테크 수단이며, 아니 진심으로 신태호보다 현실적인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일단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통장에서 잠자고 있던 돈 천만 원을 업비트 계좌에 넣었다. 바로 비트코인을 매수했다. 파란색, 빨간색 차트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일하던 와중에도 자꾸만 휴대폰에 손이갔다. 하지만 그날따라 정신없이 너무 바빴다. 결국, 8시간 동안 휴대폰을 열 수는 없었다. 인수인계를 끝내자마자 코인 거래앱에 접속해서 확인했다.
[잔고 : 12,850,000 원 (+20%)]
"... 이게 진짜 되네."
상혁은 퇴근길에 다음 달 만기 예정이던 적금 통장에 손을 올렸다. 그건 사실 ‘첫 새 차’를 위한 돈이었다. 2년 전, 그는 강원도 오지에서 중고차를 고치느라 견인차를 불렀던 기억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견인차가 오지 않던 그날, 눈 속에서 벌벌 떨며 그는 다짐했었다.
‘다음 차는 중고 아닌 새 차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된 차 뽑는다.’
그는 적금 앱을 열고 말없이 통장 잔액을 바라봤다.
'이천만 원... 이걸로 대출 조금 받으면 그랜져는 가능하겠네.'
하지만 이제 그 돈을 비트코인에 넣겠다는 거였다. 그 말도 안 되는 차트 그래프 하나에, 2년의 인내를 던지는 행동. 이번 행동은 중대한 결정이 필요했다. 그의 손가락은 계속해서 달싹거렸다.
'이걸 누르면... 다시 2년 뒤...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그랜져가 벤츠로 바뀔 수도?'
그는 이미 수익률 +20%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오로지 그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천만 원이 순식간에 1,285만 원이 됐는데, 이천만 원 더 넣으면 도대체 얼마야?'
잠시 숨을 고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빨간색 차트가 올라가 있는 걸 보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자꾸 불타올랐다. 빨간색은 부의 상징. 그에게 행동을 불러왔다.
'그래, 벤츠도 빨간색으로 사버리는 거야!'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결국 적금 해지 버튼을 눌렀다. 은행 계좌로 입금된 돈은 곧바로 코인 계좌로 옮겨졌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손끝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상혁아, 네가 또 이성보다 감정을 택했구나. 이제 이 돈을 잃으면 진짜 끝장인데.. 아니야. 옛 속담에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법이라 했어. 벤츠 있으면 미인이 올 확률도 올라가겠지? 그래, 한 번 가보자!'
이천만 원, 비트코인 추가 매수가 완료되었습니다.
[잔고 : 32,850,000 원 (+7%)]
집으로 돌아온 상혁은 샤워도 대충 끝내고, 누워서 춤추는 차트를 보며 즐겼다.
"붉은색~푸른색~사이 내가 부자가 되는 시간~"
몇 시간 후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정책을 유예하고, 자국의 외환보유고 중 일부를 비트코인으로 바꾸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달러를 스테이블 코인으로 대거 전환한다는 추가적인 호재까지 연달아 나왔다. 그 후 비트코인은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그 기세가 우주까지 뻗어 가는 듯했다.
[잔고 : 302,850,000 원 (+877%)]
상혁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다. 도대체 숫자가 몇 개인 거지? 일십백천만.. 일억? 핸드폰을 잠깐 침대 옆에 두고 본인 뺨을 강하게 쳤다. 아프지 않았다. 기쁨에 취해서 그런가 싶었다. 옆으로 굴러서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여전히 하나도 안 아팠다. 이건 조금 이상했다. 분명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때, 눈이 확 떠졌다. 창문 밖으로는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황급히 찾았다. 베개 아래에 뒤집혀 있었다. 당장 휴대폰을 켜서 코인 거래앱으로 들어갔다.
[잔고 : 13,410,000 원 (-56%)]
하룻밤 사이 이천만 원이 사라졌다. 숫자가 현실로 다가오자 숨이 턱 막혔다. 2년의 꿈이 무너지는 소리가 귀에서 멍하게 울렸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더 이상 구분이 안 갔다. 본인 뺨을 강하게 쳤다. 너무나도 아팠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온몸이 깨질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슴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바닥에 엎드려 잔고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현실적인 걱정이 맹렬하게 다가왔다.
'하필 적금을 깨다니, 내 새 차는... 내 그렌져는... 이거 언제 다시 모으지?'
핸드폰 알림이 하나 올라왔다. 은행에서 적금 해지에 대한 안내 문자였다.
'만기 이자 없이 해지된 상품입니다.'
상혁의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밤 동안 비트코인이 폭락한 이유를 검색해 봤다. 가장 상단에 투자의 귀재 '워랜 버핏'의 인터뷰가 있었다.
[코인은 화폐로서 본질적 가치가 없다]
상혁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집 안 창문을 모두 열어 맨 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너무 춥고, 따갑고, 콧물까지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가 맨몸으로 응축시켜 둔 신음을 발산했다.
"으아아... 그래 이게 인생이다!!!"
그는 맨몸으로 소리치다 말고, 갑자기 '푸하하'하고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3억짜리 꿈의 대가가 고작 마이너스 이천만 원이라니. 생각해 보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웃겼다.
코인은 떨어졌고, 통장은 텅장처럼 보였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뭔가를 진심으로 해봤다는 사실만은 남았다. 실패는 그 안에 은근한 짜릿함과 강력한 고통, 그리고 경험만이 남는다.
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래, 역시 나는 재미있게 살아야 해. 내 몸과 얼굴처럼!"
그는 바닥에 있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노트를 꺼내더니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생 오답 노트]
그는 오답 노트의 중간쯤 피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유튜브 : "장비만 좋으면 안 됨. 말만 잘해도 안 됨. 편집이 사람을 잡는다."]
[코인 : "자면서 돈 벌기는커녕, 개꿈만 꿨음."]
다음 줄은 비워뒀다. 어쩐지 이 오답 노트가 꽤나 두꺼워질 것 같았다. 그건 뭔가 또 해볼 생각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전 페이지에 적힌 실패의 기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하주 또한 기록을 자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주도 매번 꼼꼼히 뭐를 적던데... 갑자기 궁금해지네.'
상혁이 지켜본 그는 항상 모든 걸 계획하고 정리했다. 저렇게 사는 건 피곤하지 않을까, 재미없지 않을까 속으로 비웃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과 달리 좌절도, 실패도 없이 잘 살고 있는 건지 몹시 궁금해졌다.
‘근데 하주는 도대체 뭘 하면서 살고 싶어 할까?'
왠지 그가 기록해 둔 모든 것들을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