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순간의 재미로, 누군가는 현실의 타협으로, 또 누군가는 오래된 습관처럼.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그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오늘, 나도 살아냈다는 것.
하주는 여느 날처럼 병원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자동문을 지나고, 카드 리더기에 태그를 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혀있는 문이 띡-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주는 의식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가능할 만큼 익숙한 동작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복되는 움직임. 마치 잘 조율된 기계 부품처럼. 이곳은 언제나 같은 공기, 같은 빛, 같은 소리로 하주를 맞았다.
남자 탈의실 안에는 상혁과 태호가 먼저 와 있었다. 그곳은 늘 그렇듯 무심한 냄새로 가득했다. 가끔은 발냄새, 가끔은 땀냄새, 또 어떤 날은 멍한 공기가 짙게 깔리는 곳.
그 분위기를 없애기라도 하는 듯 상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셔츠 단추를 채우며 아무렇지 않게 툭 던졌다.
“야, 나 아직은 없는데, 진짜 재밌는 거 하나라도 생기면 고민도 안 하고 이 병원 바로 나간다. 어디 생기기만 해 봐.”
태호가 옆에서 크룩스를 신다 말고 대꾸했다.
“오호 재밌는 거 생기면? 근데 생겼냐?”
“아직은. 근데 생길 수는 있잖아.”
“뭐 생길 수는 있지. 근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일까?”
상혁은 어깨를 으쓱이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정리했다. 잘생기진 않았어도,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특히 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하지만 재미를 갈망하는 모습만큼은 어느 직장에서도 볼 수 없는 얼굴.
“야. 인생도 결국 밈처럼 굴러가는 거야. 진짜. 한 번 빵 터지면 몇 년 버티기도 해. 어떤 사람은 술자리에서 나눈 헛소리로 인생 바뀌기도 한다고.”
태호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었다.
“야 그것도 20대에나 가능한 거지. 너는 아직도 그런 헛소리에 인생 걸 거야?"
“걸진 않아. 근데 가끔 그런 게 진짜일 때도 있더라. 왜 있잖아. 누군가에겐 밈이 진짜 삶이고, 진짜 자유일 수도 있다는 거.”
하주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약간 미간이 좁혀졌던 것 같다. 상혁의 말은 늘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했다. 가벼운 듯 깊고, 진지한 듯 허공에 던져졌다가 묘하게 남는 말. 하지만 금방 또 없어지는 말.
태호는 여전히 현실 쪽에 서 있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솔직히 그렇게 살아서 뭐가 남겠냐. 병원 그만두면 끝이야. 우리 또래에 연봉 이만큼 주는 곳도 없어. 빅 5 병원 비교해 봐. 환자 중증도 낮은 것에 비해서 페이는 비슷해. 현실적으로 여기가 최선이야.”
상혁이 조금은 진지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현실적으로만 살면...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거 생겼을 때 아무것도 못하게 돼. 태호야, 그건 알지?”
“그래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뭔데?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일해야지. 나중에 생각하자고. 그냥 버티는 거야. 설레는 일? 야, 나중에 해. 아니, 그냥 지금 돈 벌면서 취미로 해. 괜히 퇴사하고 헛짓거리 하다가 후회하지 말고.”
그 말에 하주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뼈가 있었다. 현실은 늘 말끝을 가장 차갑게 남겼다.
그때였다.
탈의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다들 일찍 왔네."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 유찬식 선배였다. 늘 정중하고, 늘 조용한 사람. 말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어떤 ‘결’ 같은 게 있었다. 오래 묵은 나무 같달까. 바람이 불어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찬식은 말없이 자신의 사물함을 열고 유니폼을 꺼냈다. 뒷모습마저 조용했다. 그의 사물함 문 안쪽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노트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하주는 그것이 왠지 모르게 궁금해졌다. 사물함이 닫히고, 눈길을 다시 찬식에게로 돌렸다. 구겨짐 없는 셔츠, 늘 한결같은 습관들. 그는 그렇게 16년을 여기에 있었다.
‘찬식쌤은 어떻게 16년을 버틴 거지?’
여기가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못 빠져나간 걸까. 대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저 뒷모습만 바라봤다. 그때, 찬식이 무심하게 말했다.
“오늘 응급실 환자 상태 안 좋더라. 다들 환자 파악 잘하고.”
그 한 마디. 오로지 일 얘기뿐이었다. 그 짧은 말에서도, 어쩐지 묵직함이 느껴졌다. 마치 오랜 시간 쌓인 무언가가, 그 말 안에 같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하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또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저 선배는 지금 설레는 게 있을까?’
어쩌면 하주 눈앞에서 급하게 사라진 저 노트 속에 그 답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은 늘 똑같았다. 정확히는, 똑같지 않게 정신없었다. 누군가의 울음소리, 누군가의 호출음, 누군가의 욕설. 그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환자들, 보호자들, 그리고 의료진들.
그 속에서 상혁이 있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빠르게 움직이고,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까 탈의실에서 ‘재밌는 게 생기면 나간다’고 말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집중한 얼굴이었다. 환자의 팔에 주사를 잡으면서 농담도 한 마디 던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환자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태호는 반대편에서 침착하게 환자 전산을 체크하고 있었다. 수치를 확인하고, 절차를 되짚고, 깐깐하게 약물을 확인했다.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손끝은 단단했다.
하주는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봤다. 조금 전 탈의실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재미없다고 말하던 놈들은 도대체 어디 간 거냐...'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프로 같았다. 다들 똑같이 살고 있었다. 재밌는 게 없어도, 설레는 게 없어도. 그냥 저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다. 하주는 잠시 거칠어진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힘을 풀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그냥, 눈앞의 일을 해내는 수밖에. 그는 고개를 들어 다음 환자의 차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길고 길었던 그들의 하루가 끝이 났다. 일은 항상 힘들었지만, 인계시간도 항상 찾아왔다. 하주는 다음 근무 동료에게 환자 인계를 끝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 하주가 무심코 지갑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교통카드를 안 가져왔다. 손가락이 잠시 공중에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정류장 옆 공유자전거 거치대가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 타고 집에 가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그 말이 나온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자물쇠를 풀고, 안장을 조정하고, 바퀴에 공기를 확인했다. 무언가를 오래 기억한 몸의 습관처럼 그가 움직였다.
페달을 밟자 익숙한 무게가 다리로 전해졌다.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는 자전거로 등하교를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었지만, 나중엔 하루를 정리하는 통로가 되었다. 친구들에 대한 스트레스, 공부에 대한 피로, 미래에 대한 막막함. 그 모든 걸 달리며 정리했다.
시원한 바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조용한 속도. 그건 늘 잔잔한 위로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안양천 옆으로 난 자전거 도로를 따라 페달을 밟자, 공기가 달랐다. 병원 안의 폐쇄된 공기와는 다른 투명함. 귓가에서는 '촤아아'하고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바람이 볼을 스쳤고, 어깨를 지나, 등 뒤로 흘러갔다. 핸들을 통해 전해져 오는 길 위의 미세한 진동이 오히려 기분 좋게 느껴졌다.
4월의 밤, 벚꽃은 활짝 피었다가 이제 지는 중이었다. 벚꽃이 어느 꽃보다 예쁜 건 어쩌면 금방 폈다가 금방 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명 아래 흩날리는 꽃잎들이 자전거 옆을 따라 흘렀다. 그건 마치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벚꽃 나무 사이로 손을 잡고 걷는 여러 커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한 커플이 눈에 띄었다. 각자 가방을 메고, 나란히 걸었다. 손을 꼭 붙잡고 걷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저들이 들어가게 될 직장은 설레는 공간일까?’
그 생각들은 바람처럼 얼굴을 스쳤다. 그리고 사라졌다.
하주는 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넓은 안양천과 도림천이 연결되는 지점을 지나며 몸이 아니라 마음이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의 무거움, 업무의 피로, 앞으로의 걱정들. 그 순간만큼은 모두 바람 속으로 날아갔다. 하주에게 자전거란 그런 것이었다. 마치 어려운 문제와 한참을 씨름하다, 문득 뒤페이지의 해답 편을 반짝 떠올리는 수험생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집 근처에 도착해서 자전거를 세웠다. 하주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바라봤다. 숨이 조용히 들고 났다. 날카로운 감정은 이미 다 갈려 나간 느낌이었다. 단지 조용히,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설레는 게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순간의 재미로, 누군가는 현실의 타협으로, 또 누군가는 오래된 습관처럼.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그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오늘, 나도 살아냈다는 것.
"그래, 오늘도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