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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내가 생각한 꿈이 아니야

소설 연재

by 태섭
하주는 벽 앞에 있는 게 확실했지만, 꾸준하게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주말 오후, 그의 휴대폰 알림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구독자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어느 유명 작가가 자신의 SNS에 하주의 '감사 일기' 글을 공유하며 이렇게 쓴 것이었다. [이름 모를 어느 간호사의 글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낼 진짜 위로를 얻었다.]

하주는 SNS에 글 올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병원에서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책장을 넘기며 적어 내려간 감상문들은 누군가에게는 일기 같았고,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팔로워 수는 어느새 천 명을 넘어서더니 삼천 명 가까이로 불어났다. 숫자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그의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메시지함에는 새로운 요청이 이어졌다.


"지금까지 읽으신 책 리스트를 한 번 올려주실 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번에 제 신간이 나왔는데 소개말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주는 잠시 생각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글을 소개할 자리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책 한 권을 쓰려면 몇 백 권은 읽어야 한다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소개받은 에세이로 볼 때 하주는 아직 에세이라는 장르를 백 권도 읽지 못한 상태였다. 자신은 여전히 배우는 입장이고, 그저 기록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우연히 쓴 글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감사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받은 작가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쉽네요.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도 충분히 글을 쓰셔도 될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시잖아요. 요즘 작가 지원 플랫폼에서 에세이 공모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혹시 한 번 도전해 보시는 건 어때요?”


하주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공모전이라니... 내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편이 흔들렸다. 간호학과에 지원할 때도, 윤슬에게 고백할 때도, 병원 면접을 볼 때도, 응급실에 발을 들일 때도, 내 집 마련을 꿈을 가질 때도, 독서 모임을 시작할 때도, 심지어는 이 SNS에 첫 글을 올릴 때도 그는 늘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곱씹어 생각해 보면 그 질문은 두려움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도전하기에 앞서 나오는 습관 같았다. 결국에는 그 질문 뒤에 이렇게 덧붙여졌다. 이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냥 해보자."


하주가 공모전에 지원하려는 분야는 [에세이]였다. SNS에 올리던 독서 감상문은 남의 글을 빌려온 감상이었지만, 에세이는 자신의 삶을 직접 건드리는 글이라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 다행히 그는 평범한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을 붙잡아두려는 마음으로 지난 일 년 동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었다. 그것들 덕분에 최소한 시작은 할 수 있었다.


책장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낡은 노트들을 꺼냈다. 누렇게 바랜 페이지마다 하주의 지난 시간들이 눌어붙어 있었다. 병원 탈의실에서 쓰다 말아 삐뚤어진 글씨, 윤슬과의 미술관 데이트를 적어놓은 들뜬 문장, 독서모임 뒤풀이 자리에서 몰래 끄적인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자기만 아는 언어였고, 자기만 읽을 수 있는 기록들이었다.


'이걸 어떻게 에세이로 바꾸지?'


단순히 일기를 옮겨 적는다고 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누군가와 함께 읽을 수 있는 글, 혼잣말이 아니라 대화로 건네는 글이어야 했다. 그는 노트북 앞에서 며칠 동안 단어를 지우고 붙잡으며 씨름했다. 일단 에세이 대표 제목부터 막혔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붙였다.


[일상 속 소소한 행복]


아무리 다시 보아도 식상했다. 공모전에 제출한다면, 심사위원이 제목만 보고 탈락시킬 게 눈에 그려졌다. 차별성이 없었다.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데, 순간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병원 탈의실에서 상혁이 자신의 노트를 보고 있던 장면이었다.


"상혁? 지금 뭐 해? 야! 그거 내 거잖아!"

"아, 여기 의자에 떨어져 있길래... 누구꺼지 하고 잠깐 본 거야."

"흘렸나 보네. 야, 아무리 그래도 남의 일기를 훔쳐보면 어떻게 해."

"미안, 미안. 야 근데, 눈앞에 '일기'라고 크게 적힌 노트가 있는데, 그냥 지나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건 게임 중독자의 집에다가 피시방을 만들어놓고 ‘그냥 지나치세요’ 하는 거랑 다를 바가 없다고. 아무튼 미안한데, 어쩔 수 없었다."


하주는 상혁의 억지 같은 농담에 하주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누군가 내 일기를 훔쳐본다면 그건 화낼 일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닐까?


에세이의 대표 제목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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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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