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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독서모임 페이지

소설연재

by 태섭
하주는 멍하니 자신의 캐비닛 속 노트를 쳐다봤다. 수없이 적어 내려간 다짐과 계획들. 그 모든 것이 혼자서는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혼자는 어렵다. 함께라면 어려운 목표도 더 쉽게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지독한 슬럼프를 벗어날 마지막 동아줄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점점 소설을 읽는 일이 벽처럼 느껴졌다. 문장이 아니라 돌담을 넘는 것 같았다. 상상 속에서는 늘 설렜지만, 현실의 독서는 종종 고된 노동이었다. 빨리 일어나는 버릇도, 출근 전 중고서점 루틴도, 포스트잇의 ‘독서 1시간/글쓰기 10분’도 지켜지고 있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숨이 얕아졌다. 소설만 붙잡으니 호흡이 한쪽으로 쏠렸다. 균형이 맞춰지지 않았다. 아직 읽은 건 더 쌓여만 가는데.


하주는 평소처럼 알람을 듣고 눈을 떴다. 그러나 평소보다 늦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오른쪽 협탁 위, 늘 붙어 있던 포스트잇은 흔적도 없었다. 출근할 때 가방 또한 가벼워졌다. 가방조차 신경 쓰지 않을 때도 있었다. 종종 사각거렸던 소리는, 휴대폰을 탁탁하는 소리로 대체됐다. 그의 어깨만이 텅 빈 무게를 기억하는 듯했다.


“야, 임하주. 매일 거북이 등껍질처럼 메고 다니던 거 어디 갔냐. 꽤 멋져 보였는데.”


먼저 병원 탈의실에 도착한 상혁이 툭 던지듯 물었다. 하주는 웃으며 자신의 한쪽 어깨를 반대편 손으로 쓰다듬었다.


“책 때문에 들고 다니긴 했는데, 요즘은 꺼내도 잘 안 읽게 되네.”

“오호, 책? 나도 책 읽는 거 엄청 좋아했는데. 진짜 미친 듯이 읽었어."

“그래? 근데 왜 읽는 걸 못 봤지?”

“물론 군대 때 한정. 그때는 할 게 없어서 읽었는데, 요즘은 재밌는 게 너무 많잖아."

"하긴... 재밌는 게 많은데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

"어떤 유튜버가 그랬는데, 대한민국 성인의 절반이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데! 나도 대세에 동참하는 거야."


하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죄책감이 살짝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경제 유튜버? 딱 현실적 통계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도 다들 휴대폰만 만지고 있긴 해... “


옆에 있던 태호도 옷을 고쳐 입으며 피식 웃었다.


"성인 되니까 이제 각자 살기 바쁜 거야. 지하철이나 버스 같이 정신없는 곳에서 책이 눈에 퍽이나 들어오겠다."


얼마 전까지 열심히 책을 읽었던 하주도 씁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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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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