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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캡슐옷장을 만들어버렸다

1년 사계절 옷 전부 20벌

by 파슈하 Mar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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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 20. ...어라?"


옷장 앞에 서서 옷걸이의 개수를 다시 세어본다. ...18, 19, 20. 아무리 세어도 20이 맞다.



그러니까, 이건 내 4계절 옷 전부의 개수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캡슐옷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참 귀여운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캡슐옷장이란 아주 적은 수의 옷을 조합하여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옷들만을 모아놓은 옷장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옷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이다. 옷의 수는 줄이고 활용도는 높이는 점에서 참으로 미니멀리스트의 옷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스타일이고 뭐고. 그저 옷 수납장이나 행거를 사고 싶지 않아 시작한 일이었을 뿐이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한 칸짜리 붙박이장이 전부였고, 수납가구를 들이고 싶지 않아 옷을 줄이게 되었던 것이 내 캡슐 옷장 역사의 시작이었다.


다른 입주민들은 이 붙박이장을 일컬어 <턱없이 작은 수납장>이라고 불렀다. 안방에 한 칸, 작은 방에 한 칸 반. 이것이 이 집이 가진 붙박이 옷장 스펙의 전부였다. (아무래도 설계한 사람이 대단한 미니멀리스트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보통은 작은방 하나를 전체로 옷방으로 꾸미는 것이 입주민들 사이에 유행 아닌 유행이었다.



당시엔 정착할 동네를 찾지 못해서 2년마다 이사를 다녔던 터라 쓸데없이 가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행거는 지저분해 보였다. 어떻게 서든 저 좁아터진 붙박이장 안에 내 옷과 아이 옷을 전부 넣고 말리라. 비장하게 다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싱겁게 끝났다. 당시 이미 미니멀 4년 차였던지라 옷이 크게 많지 않았던 것이다.





옷장 정리 팁의 한 가지 방법으로, 옷걸이를 통일하면 옷장이 좀 단정해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이 있다. 마침 이사도 했겠다, 새로운 인테리어템을 사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틈을 타서 내 옷장의 옷걸이를 전부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옷걸이를 몇 개 사야 할지를 정했어야만 했는데 나의 사계절 옷 전체를 세어보니 약 60벌 정도가 나왔다. 바지는 접어두고, 버릴 옷은 한 번 더 버리기로 마음먹으니 옷걸이는 50개만 사도 괜찮을 듯 보였다. 옷걸이 50개가 배송되던 날, 나는 나 자신과 약속했다.


이제 내 옷은 50벌을 넘기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한 동안 옷을 50여 벌 안팎으로 유지했다. 출근할 때 입는 옷과 잠옷, 한겨울 발열내의까지 전부 합친 개수다. 거기에 '언제든 길 가다가 맘에 쏙 드는 옷을 만난다면 주저 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늘 빈 옷걸이를 3개 정도는 유지했으니 보통 50벌 아래로 유지했던 것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개수가 줄어드니(엄밀히는 옷걸이 개수가 적으니) 옷 한 벌을 구매해도 디자인, 소재, 세탁방법 모든 것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구입했다. 소재도 편해야 하고, 세탁도 편해야 하는데(왜냐하면 세탁소에 가는 게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출근할 때 입을 수 있을 정도로 격식도 좀 갖추면 좋겠고 밤에 잘 때 입어도 불편하지 않도록 편한 소재면 좋겠다.


이게 말이 되겠나 싶으신 분도 계실 텐데 잘 찾아보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한 벌, 한 벌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내가 마음에 쏙 드는 옷들만 고르고 골라 캡슐 옷장을 만들어냈다. '조금 애매한데?' 싶은 건 절대 사지 않았다.


게다가 요즘엔 출근을 하고 있지 않으니 입었을 때 '예쁨'으로 기능을 다 한 셔츠, 블라우스 같은 것들은 옷장에서 점점 빠져나갔다. 어차피 있어도 잘 입게 되지 않으니. 편하긴 하지만 디자인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도 전부 옷장에서 뺐다. 입었을 때 기분이 상쾌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이 안 가는 옷들을 점점 다 빼내고 났더니 사계절 20여 벌의 아담한 옷장이 되고야 만 것이다. 이 정도면 캡슐 옷장이 아니라, 캐리어 옷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엄마와 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았던 적이 있다. 캐리어 하나만 들고 가출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며 "엄마, 캐리어 하나에 뭘 넣을 수 있다고 저것만 들고 갈까?"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사계절 옷, 화장품, 액세서리 귀중품 등등 다 해도 캐리어 하나에 다 담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시절 그렇게 놀려서 합니다. 나도 이게 가능한 줄, 이제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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