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배움의 시기
1970년대 – 첫 배움의 시기
1970년대는 중동전쟁(1973년)과 오일 쇼크(73~74년, 79년)로 세계 정치와 경제가 뜰썩였다. 이란에서는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축출되고, 호메이니가 정권(1979년)을 잡았다. 駐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태도 발생해, 미국과 이란은 대결국면을 걸었다.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해, 소련도 미국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늪에 빠진 것처럼 되어버렸다. 대영 제국이었던 영국은, 영국병에 갇혀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중국은 60년대 문화혁명의 광풍과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개혁개방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이 그 개혁개방을 지휘했다.
1970년대 음악은 록이 미국 주도로 헤비메탈, 프로그래시브 록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록이 영국 주도였다면, 1970년대는 미국의 반격이었다. 소프트 록은 밥 딜런, 펑키 음악은 비지스가 대표적이었다. 퀸과 아바는, 당시 뮤직 비디오를 가장 잘 활용했던 아티스트였다.
마이클 잭슨의 인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앞으로 20년을 성장하는 발판을 이 시기에 마련했다. 카세트테이프가 보편화되면서, 음악이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1970년대는 찌르고 찌르고, 디스코의 전성기였다.
우리나라는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 벌어들인 돈, 일본의 전쟁 피해보상금을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통.블.생.’이라고 해서 통기타, 블루진, 생맥주가 당시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윤복희의 미니 스커트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1969년 KBS/MBC/TBS 방송 3사 체제가 가동되면서, 바야흐로 TV시대가 개막되었다. 1970년대 국민 스포츠는 축구, 권투, 레슬링이었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 고교야구의 전성기였다. 이들이 성장해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금메달이 나왔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일궈냈다.
영화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가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성룡의 ‘취권’은 1백만명 이상을 끌어 모아, 1970년대 최고 관객기록 타이틀을 가졌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1960년대 미국 록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1970년대 신중현이 첫 록 그룹을 탄생시키고 활동했다.
1974년 삼성물산이 종합무역상사 1호로 선정되었고, 무역업 종사자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비행기 승무원(스튜어디스/스튜어드)과 전당포 관련 직업도 각광받았다. 명절 선물에 커피, 속옷, 비누가 인기 있었다. 명절 선물세트라는 개념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1970년대 해외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이 유행했다. 이 펜팔이 훗날 인터넷과 앱을 만나면서, 지금의 SNS로 진화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펜팔이 SNS의 원조인 셈이다. 이 시기에 국군장병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나도 보냈다.
나는 1970년 유치원을 시작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시기에 마쳤다. 내 인생에서 첫 배움의 시기였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의 맛과 멋을 알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개구쟁이 친구들, 배움의 추억들이 내 두 번째 Decade의 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