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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우마 Sep 25. 2024

나도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수족구 극복일기

 올해 7월은 유독 더웠다. 펄펄 끓는 무더위가 지속된 것도 있지만 이제 막 돌을 지난 아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돌치레라고 하던가. 감기에 걸려도 사나흘 약만 먹으면 금세 낫던 아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39도를 넘는 고열이 수시로 오가고, 코감기가 길어지더니 중이염이 되고, 중이염이 끝나려니 구내염에 걸렸다. 나름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기의 감기가 길어지자, 그간 잘 버텨온 내 몸에서도 이상증세가 시작됐다. 갑작스레 콧물과 재채기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도를 보이는가 싶었던 아기의 손발에 처음 보는 반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파도 먹는 건 거른 적 없던 아기가 어떤 음식을 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했다. 아기 몸에 작은 반점으로 시작됐던 수포는 몸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병원에선 아무래도 수족구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 겪는 병에 걸린 아기와 주 양육자인 나까지 아슬아슬해진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나는 결국 친정에 쫓기듯 내려갔다. 씩씩했던 전화 목소리와 달리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나와 시아를 보자, 엄마는 잘 내려왔다고 등을 두들겨주며 말을 아꼈다. 내가 쓸 방엔 단정하게 정리된 침구 위에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든 여름용 파자마가 고이 접혀 놓여 있었다. 나는 패배한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병사처럼 쓰러져 누웠다. 잠시 아늑함을 느낄 틈도 없이 아기의 상태와 서울에서 싸 들고 온 짐 보따리들을 정신없이 엄마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에,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고 잠이 들었다. 


 “이게 꿈인가.”

 거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름시름 앓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른들에 둘러싸여 기저귀마저 죄다 벗어버린 채로 거실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몸에는 붉은 수포가 잔뜩인데 아기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엄마, 아빠는 이 헐벗은 꼬마 광대를 귀여워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함께 장난치고 있었다. 아침만 해도 모든 음식을 거부했던 아기는 엄마가 떠주는 아이스크림과 체리 조각을 먹으며 신나게 거실 곳곳을 돌아다니고, 낯선 가구와 벽체를 두들기며 새로운 사물을 탐색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에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며칠을 자다가 깬 것인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지켜보니 할머니의 사랑에는 한도가 없었다. 수포가 잔뜩 생긴 엉덩이가 덧날 새라 기저귀를 풀어주고, 방 안 곳곳에 용변을 보는 데도 싫은 기색 없이 그저 우쭈쭈로 손주를 안아줄 뿐이었다. 잔뜩 쌓인 일회용 기저귀를 두고 천 기저귀를 쓰며, 매일 손 빨래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기가 잠들면 열대야에 뒤척이지나 않을까 뜬눈으로 아기의 곁을 지키고, 종달 기상하는 아기의 리듬에 맞춰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고 있었다. 며칠간 아기의 병간호에 지쳐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이었을까. 헌신적인 엄마의 육아를 보고 있자니 내 속에서 뜨겁고 울컥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대신해 아이를 봐주던 엄마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엄마의 따스한 사랑을 보면 볼수록 똑같이 사랑받고 컸을, 나의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그려지며 마음이 저려왔다. ‘아, 나는 이렇게 사랑받고 큰 사람이었구나’라는 예상치 못한 자각이었다.


 오래 육아를 해본 건 아니지만 하면 할수록 누군가를 돌본다는 일은 무척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움받는 건 아기지만, 종종 내가 돌봐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픈 아이를 사랑으로 간호하다 보면 똑같은 과정을 겪었을 나의 유년 시절을 떠올려보게 되고,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부모의 사랑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돌봄을 받은 사람은 아기지만, 내가 사랑받는 느낌 속에 빠진다. 마치 나는 한참을 잊고 살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육아의 과정을 통해 다시 살아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친정에서 느꼈던 울컥함과 애틋함은 내 마음속에 존재했던 막연했던 부모의 사랑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난 후에 느낀 먹먹함 때문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손녀에 대한 사랑을 보며 나는 나를 사랑으로 키운 젊은 날의 엄마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언젠가 딸에게 기억될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내가 받은 만큼의 충분한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있는 걸까? 엄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은 딸을 육아하는 내 삶의 양분이 되어 아기에게 전해지고, 언젠가 아기는 자신의 아기에게 나의 사랑을 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육아는 어떤 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이처럼 세대를 넘어 살아 숨 쉬고 엄마와 나, 그리고 아기를 단단한 사랑의 끈으로 연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법 같은 할머니 육아를 겪은 일주일 뒤, 나와 아기는 씻은 듯이 회복했다. 몸뿐만 아니라 어느 때보다 내 마음이 풍요로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아기에게 각인될 나의 사랑도 내가 받은 것처럼 넉넉하고 든든한 토양이 될 수 있기를. 이런 마음으로 아기와 함께 한다면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나를 통해 시아에게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온 맘을 다하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할머니와 손녀,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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