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아기의 순간들
"뜌울-! 뜌울-!"
입을 오물오물 거리며 꼬물꼬물한 손을 한데 모아 내민다. 겨울 귤의 맛을 알게 된 딸은 심심하면 귤 타령이다. 낱말 카드에서 배운 낯설지 않은 이름에 이토록 상쾌하고 달달한 맛이라니. 이런 세상이 있었나 싶은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귤을 반긴다. 그리고 시종일관 엄마를 따라다니며 귤, 아니 '뜌울' 달라며 외친다.
아무리 글로 잘 써보고 싶어도 현실의 반도 묘사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 경우는 행복한 무력감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한들, 자라나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활자로 다 표현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순간순간 바뀌는 변화무쌍한 아이의 표정, 어른의 머리로는 상상해낼 수 없는 행동과 반응들, 맑고 순수한 표정과 웃음소리, 그 순간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엄청난 매력.
문득 넋 놓고 아기를 보다 보면 '인간이 이토록 예쁜 존재였구나. 사랑스러울 수 있었구나'라는 뜬금없는 자각에 빠진다. 나이 들다 보면 사회 속에서 아등바등 구르다가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는 순간들이 훨씬 많아지고, 적잖이 냉소적으로 바뀌곤 한다. 나 역시 임신 직전에도 그렇고, 10년 넘는 조직생활을 경험하며 가끔 사람에 대해 너무 혐오감이 들어 내면의 동굴 속에 기어 들어가곤 했다. 그랬던 나에게 육아는 고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강력한 정신적 힐링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큼큼하고 속이 새카만 어른들의 세계를 잠시 지우고,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한 본연의 인간, 태초의 인간의 세계에 푹 빠질 기회가 되었으니 말이다.
요즘엔 청소기에 푹 빠져버렸다. 식탁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청소기를 밥 먹을 때마다 뚫어지게 바라보며 같이 놀고 싶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청소기 돌리고 싶다고. 위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와 먼지들을 빨아들이는 이상한 물건이 그저 신기한가 보다. 틈만 나면 제 몸 보다 큰 다이슨 청소기의 커다란 기둥을 잡고 휘두르려고 해서 급히 조그만 청소기 장난감을 들이기도 했다.
커다란 청소기에 비하면 작고 어설픈 모양인지라 만족감이 덜한 듯 하지만, 불빛도 나고 달달 거리는 소리도 나는 게 나름 귀여운지 잘 갖고 다닌다. "시아야, 주방 청소기 좀 돌려줘"라고 하면 잽싸게 청소기 장난감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바닥을 부리나케 장난감으로 밀어댄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몸을 뒤뚱거리며 어설픈 민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무언가에 빨려 들어갈 듯한 표정으로 하나에 집중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폭소가 나온다.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 흐하"
밥 안 먹겠다고 떼쓰는 아이와 실랑이하느라 온몸이 녹초가 되다가도 이런 순간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무장해제로 녹아내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천사처럼 잠든 아기 옆에서 오밀조밀 작은 얼굴에 가득 찬 눈코입들을 눈과 마음에 그리며, 내 속이 몽글몽글한 솜사탕처럼 차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인간이 이토록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인간사 더럽고 불쾌한 일들이 많다 하더라도 저 꼴 보기 싫었던 인간에게도 '이토록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어린 시절은 있었겠지'라는 이해의 틈을 만들어준 나의 아기. 오늘도 부족한 엄마였겠지만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거듭났길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