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
일어나기 싫다. 폭신한 이불 속에서 조금만 더 꼼지락 거리고 싶다. 왜 안돼, 당연히 되지. 코끝이 시리다. 코끝만 시리다. 괜히 콧김을 흥, 내밀어본다. 살짝 코 끝이 데워지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시려온다. 콧대도 안 높으면서 웃겨.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의식의 흐름을 거치다보니 잠이 깬다. 으랏차차 - 일어나자!
오늘 아침은 무엇으로 시작할까? 얼죽아는 옛말이다. 전기포트의 버튼을 눌러 물을 데운다. 물이 끓는 그 시간조차 참을 수 없는 아침 추위에 후리스를 찾아 방으로 들어가 옷을 껴입고 수면양말을 찾아 덧신어본다. 여름에 그렇게 덥더니 올 겨울은 또 왜 이렇게 추운건지. 푸르르르르르르, 탈칵. 전기포트가 할일을 마쳤다며 나를 부른다. 커피를 마실까 하다가 얼른 머그잔에 티백을 뜯어 넣고 물을 붓는다. 쪼르르르르. 뜨겁게 데워진 머그잔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고 소파로 가 리모컨 전원버튼을 누른다. 어제 보다 끈 연애리얼리티 예능을 틀어 마무리를 한다. 홀짝, 홀짝. 향긋한 티로 몸을 녹이고 나니 이제야 진짜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식탁 위 바구니에 한가득 들어있는 귤을 보니 침이 고인다. 껍질을 야무지게 까서 한입에 쏙! 통으로 넣어본다. 상큼한 귤과즙이 입안 가득 차고 그 주황색 비타민이 꼴깍 삼켜지기도 전에 두번째 세번째 귤껍질을 까고 있다. 귤껍질 산이 한무더기 쌓여갈 무렵 시계를 보니 나갈 시간이다. 겨울 내내 먹고 집에 박혀 겨울잠 자는 곰이 될 순 없지. 필라테스를 끊어보았는데, 오늘은 가야 한다. 지난 주에 한 번 갔단 말이다. 나는 기부천사가 아니란 말이다. 운동복을 주섬주섬 꺼내 입고 집을 나선다.
편의점의 빨간 찐빵 진열대가 잠시 내 눈길을 잡았다. 집에 갈 때 사갖고 들어가야지. 팥을 살까 야채를 살까, 이번에는 그래도 피자를 살까? 아니, 다 사버려? 행복한 고민을 하며 필라센터로 들어간다.
오늘은 나를 이겨냈다. 칭찬한다. 내 자신 기특하다. 이런 나에게 선물을 줘야지. 아까 계획한대로 찐빵..으로 가나? 아니야. 그건 마트에서 사서 쪄먹자. 우리집은 붕세권이잖아? 붕어빵은 머리부터 먹는 나는 팥붕어 머리를 입에 물곤 팥붕2개 슈붕2개로 균형잡힌 봉지와 함께 얼른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식탁 위에 붕어빵 봉지를 내려두고 얼른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사우나인 양 김이 모락모락 가득찬 샤워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환경을 생각하면 얼른 멈춰야 하는데, 뜨거운 물의 노예가 되어 물줄기 아래 굳어버리는 것이 현실. 정신 차려. 물기 탈탈 털고 얼른 겨울잠자는 북극곰st로 변신해 붕어빵 봉지와 따뜻한 커피 머그잔을 안고 다시 쇼파 위에 털썩 앉아버린다. 아, 이게 겨울의 참맛이지.
그렇게 쇼파 붙박이로 한참 시간을 보낸다. 다시 시계를 보니 또 나갈 시간이다.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날. 오늘은 게으르기도 부지런하기도 해야 한 날. 고맙게도 친구가 내 집 근처로 와주신댄다. 감사합니다.
딸랑 -
출입문에 달린 종이 내가 입장함을 알린다. 가게 내부를 살짝 둘러보니 친구가 아직 오지 않았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어디야? 먼저 시켜?' '어, 거의 다 왔어, 시켜놔!'
오늘의 약속 장소는 오뎅바. 가게 가득 진하게 배어있는 달큰한 냄새가 1차로 내 몸을 데워주고, 내 앞에서 날 기다리는 뜨끈한 어묵 국물을 한 국자 컵에 담아 호로록 마시면 몸에 시려있던 추위가 사르르 녹는다. 아 좋다. 키오스크 기계를 손가락으로 내려보며 메뉴를 스캔하고 하나하나 신중히 골라본다. 기본 어묵꼬치 몇 개와 물떡, 내가 좋아하는 곤약꼬치, 유부주머니를 주문하고 연어사시미 세트도 추가. 사케를 마셔볼까 하다가 오늘도 역시 소주다. 나는 소주다. 친구보다 먼저 온 초록병과 잔 2개. 인간 친구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겨울 친구는 이미 내 앞에 자리 잡았으니 우리 먼저 회포를 풀어볼까? 꼴꼴꼴. 잔을 채워 먼저 인사를 한다.
오늘 나는 하루종일 겨울을 먹었다. 따뜻하다.
겨울하면 떠오르는 음식, 무엇이 있나요? 주황색 천막 아래 줄세워진 붕어빵을 보면, 투명색 비닐 안에 모락모락 꼬치 어묵을 보면, 그리고 빨간 원통 안에 자리잡은 하얀 찐빵들을 보면 이제 겨울이구나, 싶지요. 그런 기억을 떠올려 글을 써보았어요.
온 세상이 하얗게 내려앉은 겨울의 모습을 보며 호호~ 김을 불어가며 오감을 자극하는 겨울음식들을 떠올려보세요. 몸과 마음에 온기가 함께 내려앉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