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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Jul 18. 2024

헤밍웨이 하우스를 찾아 키웨스트를 가다 - 2편

헤밍웨이의 4명의 부인과 그 외 여인들

키웨스트 거리


헤밍웨이 하우스에서 나온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거리의 기념품 가게


키웨스트 중심가인 듀발 스트리트(629 Duval St)에 있는 해산물 전문점이었다.

먹거리에 관심 있는 딸이 애써 찾아 놓은 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뭐가 맛있어?”

“대표 메뉴가 랍스터 롤과 조개 요린데 튀김 조개랑 타코, 가리비 클램 차우더도 있대.”   

  

모처럼 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시장기가 도니 빵 한 조각, 라면 한 그릇인들 맛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대를 가득 안고 도착한 식당은 아쉽게도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문을 여는 시간은 4시, 2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무리였다. 다시 맛집을 검색해 보았다. 웬만한 식당은 모두 쉬는 시간이었다. 문을 연 근처 식당을 찾다가 아웃백 앞에 차를 세웠다.

   

아웃백 주차장


여행에서 먹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딸은 땅끝마을 바닷가에서 웬 아웃백이냐고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두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어쨌든 아웃백은 검증된 맛집이니 들어가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강행군 뒤에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한국의 아웃백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는 식사하면서 키웨스트에서 하룻밤을 묵기 위해 숙소를 검색했다. 방이 최소 2개 이상인 에어비엔비를 찾아보니 하룻밤 묵는데 120만 원이 훌쩍 넘었다. 키웨스트를 빨리 둘러보고 마이애미로 나가서 하룻밤을 보낼지, 아니면 차분하게 하루를 더 둘러볼지 고민이었다. 우리는 중요한 곳만 더 둘러보고 너무 늦기 전에 키웨스트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마이애미에서는 호텔에 묵어도 숙박비가 3분의 1 정도였다.


     

미국 1번 국도의 끝, 키웨스트에 간다면 이곳도 꼭 들러야 하는 명소다.


이 1번 국도 상징물은 키웨스트 섬에 위치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다. 미국 1번 국도의 끝을 표시하는 표지판으로, "미국 1번 국도의 끝"이라고 쓰여 있다. 이곳 역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붐볐다.


키웨스트는 어느 곳을 가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잠시 차를 주차하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갔다.

하룻밤 더 머물면서 수영하고 싶던 바닷가


헤밍웨이의 4명의 부인과 그 외 여인들

헤밍웨이의 4명의 부인과 그 외 여인들

헤밍웨이 하우스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헤밍웨이는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살았다. 전쟁의 참혹한 경험은 그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이는 그의 성격, 행동, 그리고 작품 속에 여러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는 소설에서 인간의 취약성, 상실, 생존에 대한 주제를 다뤘다.


헤밍웨이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삶의 많은 부분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건강과 정신 상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동안 불안과, 우울증,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의 트라우마는 종종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는 행동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투우, 사파리 사냥, 심해 낚시 등 모험을 즐겼다. 이러한 행동은 그가 느끼던 내면의 불안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 경험은 깊은 상처를 남기는 대신 그의 작품에 강렬한 현실감을 불어넣어 문학적 성공을 이루게 한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했다.


헤밍웨이의 생애를 다루면서 여자관계는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카사노바 기질은  첫사랑 아그네스에게  실연을 당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헤밍웨이는 결혼 생활 중에 다른 여인들과 불륜을 저질렀고 들키면 이혼했다. 아내 친구와의 불륜도 서슴지 않았다. 일단 알려진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아그네스 폰 쿠로스키(Agnes von Kurowsky) - 헤밍웨이의 첫사랑이자 간호사(1918년 여름 ~ 1919년 초).

해들리 리처드슨(Hadley Richardson) - 첫 번째 부인(결혼 기간: 1921-1927).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 - 두 번째 부인(결혼 기간: 1927-1940).

마사 겔혼(Martha Gellhorn) - 세 번째 부인(결혼 기간: 1940-1945).

메리 웰시(Mary Welsh) - 네 번째 부인(결혼 기간: 1946-1961, 사망까지).

제인 메이슨(Jane Mason) - 두 번째 부인인 폴린 파이퍼의 친구로, 키웨스트에서 만나 외도(1930년대 중반).

잉그리드 베르그만(Ingrid Bergman) - 스웨덴 출신의 여배우, 예술적 교류와 우정을 나누었다고 되어 있으나 수상한 구석이 있다(1940년대 중반).

아드리아나 이반치치(Adriana Ivancich) - 1948년에 이탈리아에서 만난 19살 소녀로, 그의 뮤즈 중 한 명(1948년 ~ 1950년대 초). 이 시기는 네 번째 부인과 결혼한 지 2년 후쯤이다.


헤밍웨이 여자로 손꼽히는 인물은 8명이다. 그중 4명과는 정식 부부로 살았고 나머지 4명은 첫사랑을 포함한 여인들이다. 헤밍웨이는 과연 이 여인들과 어떻게 만나 사랑했고 어떻게 헤어졌으며 작품 속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정리해 본다.

 

헤밍웨이 하우스 2층 전경


첫사랑, 아그네스 폰 쿠로스키

1917년 12월, 22살의 헤밍웨이는 미국 육군에 지원했지만 낮은 시력으로 탈락했다. 다음 해 그는 뉴욕을 떠나 독일 포병대 공격으로 폐허가 된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다. 이곳에서 그는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는 긴급 수술을 받고 밀라노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여 6개월을 머물면서 운명의 첫사랑을 만난다. 상대는 7살 연상, 적십사 간호사 아그네스였다.     


건강을 되찾은 헤밍웨이는 1919년 1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그네스와 몇 달 내에 곧 결혼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기쁨에 들떠있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3월경 이탈리아 장교와 사귀게 되었다고 이별 통보를 했다.


전기 작가 제프리 메이어스는 헤밍웨이가 이때 아그네스의 거절로 큰 실연의 아픔을 맛보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 시련은 아내에게 먼저 버림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아내를 차버리는 패턴을 따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아그네스와의 인연은 <무기여 잘 있거라>에 반영되었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헤밍웨이가 이탈리아 전쟁에서 겪은 일을 아그네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썼다. 프레더릭은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이때 캐서린이 그의 간호를 맡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진다.


프레더릭은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깨닫고 탈영을 결심한다.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탈출하여 스위스에 도착해 잠시나마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캐서린이 출산 중에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하여 아이와 산모 모두 죽는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전쟁의 비극과 인간의 감정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헤밍웨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헤밍웨이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리면서 한편으로는 실연의 고통과 복잡한 감정을 이 소설에 담았다.

 

헤밍웨이의 애장품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  

해들리 리처드슨은 헤밍웨이의 첫 번째 부인으로, 그의 초기 성공에 큰 영향을 주었다. 빨간 머리의 해들리는 첫사랑 아그네스처럼 여덟 살 연상이었다. 그녀는 아그네스에게는 없는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1921년 9월 3일, 헤밍웨이는 해들리와 결혼 후 파리에 머물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헤밍웨이는 만족했다. 아그네스와 꿈꾸었던 모든 것, 즉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 넉넉한 수입, 유럽에서의 삶을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해들리는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많은 영감을 주었고, 그의 초기 작품들이 탄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1922년 파리에서 스위스로 여행하면서 해들리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헤밍웨이의 초고 원고가 담긴 가방을 리옹역 기차에 두고 내린 것이다. 이 사건은 헤밍웨이에게 충격을 주었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새로운 작품을 썼지만 잃어버린 작품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잭은 작가인 아버지를 존경하며 자랐다. 잭은 ‘범블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잭은 아웃도어 작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겼다. 헤밍웨이는 잭과의 관계에서 얻은 경험과 감정을 그의 작품에 반영했다. 잭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낚시와 사냥을 즐겼으며, 종종 아버지와 함께한 모험을 기억했다. 그의 회고록 <미국의 가르시아>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편 헤밍웨이는 출판사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고, 돌아오던 중 잠시 머무른 파리에서 두 번째 부인이 되는 폴린과 불륜 관계를 맺는다.

해들리와의 결혼 생활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작업을 하는 동안 점점 나빠지고 해들리는 헤밍웨이가 폴린과 불륜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이혼 이야기가 오가고 둘은 재산을 나눈다. 헤밍웨이는 해들리에게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수익금을 나눠주기로 약속하고 1927년 1월 이혼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여주인공 브렛 애슐리는 여러 여성의 복합체지만, 해들리와의 결혼 생활과 파리에서의 경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특히 해들리의 역할은 헤밍웨이의 초기 성공과 파리에서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헤밍웨이 하우스에 걸린 4명의 부인 사진, 가운데 사진이 헤밍웨이다.


두 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

폴린 파이퍼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으로, 두 사람은 해들리와 이혼한 지 몇 달 후인 1927년 5월 결혼했다. 폴린은 잡지 편집자였고, 그녀의 재정적 지원 덕분에 헤밍웨이는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들은 키웨스트에서 주로 생활했는데 이곳에서 헤밍웨이는 많은 작품을 썼다.


폴린과의 에피소드는 1편에 언급한 수영장 이야기가 있다. 항간에는 헤밍웨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게 된 폴린이 헤밍웨이의 권투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수영장을 팠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폴린은 아칸소의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보그’의 편집자로 일하며 파리에서 머물렀다. 결혼하기 전 헤밍웨이는 폴린을 따라 개종했다. 그해 말, 아이를 갖게 된 폴린은 미국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헤밍웨이 하우스 정원


1928년 6월 28일 아들 패트릭이 태어났다. 폴린은 출산 당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들 패트릭은 아프리카에서 농업과 보존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는 아프리카 사파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썼는데 이 소재는 가족과의 시간에서 영향을 받았다. 헤밍웨이의 작품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은 그가 아프리카에서 사냥하며 보낸 경험을 쓰고 있다.

   

1931년 11월 12일, 헤밍웨이의 세 번째 아들인 그레고리 헤밍웨이가 태어났다. 후일 그레고리는 성전환 수술을 받고 글로리아(Gloria)로 이름을 바꾸었다.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직접 그레고리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가족과의 복잡한 관계와 성(性) 정체성에 대한 주제는 그의 글에 영향을 미쳤다.


그레고리는 평생 정신 건강 문제와 싸웠으며, 성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겪었다. 헤밍웨이의 아들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로, 그의 삶은 헤밍웨이 가족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그레고리의 자서전 <파파>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폴린의 삼촌은 부부에게 키웨스트에 집을 마련해 주었다. 2층 집에 마차 차고가 딸린 이 집은 곧 헤밍웨이의 작업 공간이 되었다. 헤밍웨이는 아침 6시면 일어나 서재에서 글을 쓰고 오후에는 낚시를 즐겼다.     


헤밍웨이 하우스 2층 베란다에서 보이는 길 건너편 등대


헤밍웨이 하우스 길 건너편에는 등대가 있는데 2층 베란다에서 등대가 보인다. 헤밍웨이는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올 때 집 앞의 등대를 보고 길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 등대는 1825년에 건설되었다. 높이 65피트(약 19.8m)로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 중 하나다. 등대는 키웨스트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서양과 멕시코만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이 등대 역시 키웨스트 섬의 상징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다.


한편 헤밍웨이는 키웨스트에서 지내는 동안 동네 술집 슬로피 조스(Sloppy Joe's Bar)의 단골이었다. 이 술집은 키웨스트의 중심가인 듀발 스트리트와 그린 스트리트의 교차로에 있다. 1937년 현재 장소로 이전한 이후 술집 역시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헤밍웨이는 술집 주인 조 러셀과 친했으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술집에서 헤밍웨이는 세 번째 부인 마사 겔혼을 만난다. 

    

키웨스트 거리를 지나면서 찍은 어느 집 정원


세 번째 부인 마사 겔혼

1939년 봄부터 헤밍웨이는 9살 연하인 마사와 외도를 했고 폴린과 점점 멀어졌다. 그는 쿠바의 아바나 근처에 있는 농장 ‘핀카 비히아’를 빌려 마사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해 여름 폴린이 아이들과 함께 농장을 방문했다가 헤밍웨이와 이혼을 결심한다.     


헤밍웨이는 폴린이 떠나자 1940년 11월 20일 샤이엔에서 마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마사 겔혼은 전쟁 기자로서 커리어를 가진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그가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취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사 역시 헤밍웨이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전쟁 소설에 등장한다.

마사는 평소 자신의 경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헤밍웨이와의 결혼 생활이 그녀의 기자 생활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원했다.

헤밍웨이가 런던에서 교통사고로 뇌진탕에 걸리자 마사는 헤밍웨이를 간호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마사는 헤밍웨이가 기자 전용으로 나오는 비행기 표를 얻는 것을 도와주지 않아 폭발물이 실린 배를 타고 대서양을 힘겹게 건너와야 했다. 화가 난 마사는 헤밍웨이가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이혼 요청을 했고 자신과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말했다.

   

“나는 헤밍웨이의 세 번째 부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마사 겔혼은 네 명의 아내 중 유일하게 헤밍웨이를 찬 여인이었다. 결국 마사는 작가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유능한 기자로서의 자신을 삶을 더 소중히 여긴 듯하다.


키웨스트 거리 전경, 멋진 대저택이 많았다.


네 번째 부인 메리 웰시  

메리 웰시는 헤밍웨이의 네 번째 부인으로 그가 말년에 함께한 여인이다.

1944년 5월부터 1945년 3월까지 헤밍웨이는 런던과 유럽 등지에 머물렀다.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 헤밍웨이는 당시 ‘타임’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던 메리 웰시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마사와 이혼 후 1946년에 메리와 결혼한다.


결혼 5달 이후 메리는 자궁 외 임신을 하게 되고 그즈음부터 수년 동안 헤밍웨이 가족은 수많은 사고와 건강 문제를 겪는다. 메리는 스키를 타다가 오른쪽 발목과 왼쪽 발목을 다쳤으며, 1947년 교통사고에서는 아들 패트릭이 머리를 심하게 다친다. 그즈음 헤밍웨이는 친구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게 되자 큰 우울감에 빠진다. 이후 헤밍웨이는 심각한 두통과 고혈압, 비만, 당뇨병으로 고생했다. 이는 일련의 사고들과 과한 음주 탓이었다. 다행히 메리는 충실히 남편을 돌보았고 헤밍웨이의 작품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었다.


헤밍웨이의 자전적 소설인 <킬리만자로의 눈>은 메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주인공인 해리 캐바나는 헤밍웨이 자신이며 아내인 헤더 혼은 메리 웰시를 상징한다. 헤밍웨이는 메리 웰시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격정적인 관계는 소설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영화 포스터


1948년 두 사람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베니스에서 몇 개월간 머물렀다. 그곳에서 53살의 헤밍웨이는 19살 소녀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와 사랑에 빠진다. 헤밍웨이는 이 이야기를 <강 건너 숲 속으로>로 녹여냈다. 이 소설은 쿠바에서 메리와 다투는 와중에 작업하여 195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는다. 그 이듬해 <강 건너 숲 속으로>의 실패에 화가 난 헤밍웨이는 8주 동안 <노인과 바다>의 초고를 집필했다.


1954년 헤밍웨이는 두 차례의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었고 이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메리는 그의 회복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헤밍웨이는 사고 이후로도 계속 글을 썼으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다.


메리는 헤밍웨이가 죽는 날까지 함께 지냈다. 1961년 7월 2일 헤밍웨이는 61세의 나이로 가지고 있던 샸건을 이용해 자살했다. 메리는 헤밍웨이의 자살을 사고라고 우기며 끝내 그를 감쌌다.  

  

이 외에 헤밍웨이와 얽힌 여성들은 또 있다.

제인 메이슨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인 폴린 파이퍼와 친구였던 미국 사회 명사였다. 그녀는 활발하고 모험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키웨스트에서 만나 친분을 쌓고 불륜으로 발전했다.

     

잉그리드 베르그만은 유명한 스웨덴 출신의 여배우다. 헤밍웨이와 친구였으며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연이었다. 헤밍웨이와 베르그만 사이에 로맨틱한 관계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믿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주로 예술적 교류와 우정을 나눴다고 말한다.

     

헤밍웨이 하우스 벽에 걸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포스터


헤밍웨이는 1948년 이탈리아 여행 중 19살의 아드리아나 이반치치를 만났다. 그녀는 헤밍웨이의 뮤즈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그와 열정적인 서신 교환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드리아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강 건너 숲 속으로>의 레나타 캐릭터의 영감이 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플라토닉 했으나 헤밍웨이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베니스에서 난 그녀와의 관계는 헤밍웨이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지금까지 기록에 남은 헤밍웨이의 여인들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사실 기록에 적혀 있지 않은 여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여인들 중에 헤밍웨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바로 첫 번째 부인 해들리 리처드슨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헤밍웨이는 해들리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파리에서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해들리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여겼다.


이 책에 의하면 헤밍웨이는 해들리와의 이혼을 가장 크게 후회하고 있다고 적었다. 돌이켜보면 해들리와의 결혼 생활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된 시간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해들리와 관계가 끝난 후에도 사랑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대목을 정리하다 보니 왠지 웃음이 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들은 끝은 조강지처인 모양이다.


헤밍웨이는 영원한 카사노바로 남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의 인생에 관여한 여인들을 통해 그의 작품이 더 풍성하고 깊어졌다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하다.


-끝-




<양해의 글>


<지난주에 예고했던 타이틀>

*헤밍웨이의 네 명의 부인과 세 명의 자녀들

*헤밍웨이 작품에서 꽃을 언급한 책과 글귀

*가 좋아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키웨스트의 가볼 만한 곳


**위에서 예고한 글 중 헤밍웨이 작품에서 꽃을 언급한 책과 글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원고가 길어 다 쓸 수 없어서 일단 따로 보류해 두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서 꽃을 언급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내용 만으로도 2화는 채울 수 있을 듯하나 너무 키웨스트에 머무는 듯하여 일단 후일을 기약한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재할 예정이니 널리 양해를 바란다.


<다음 주 예고>

4화 잭 런던 <하와이 이야기> 배경지 빅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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