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가 남쪽으로 향할수록 눈에 띄는 나무가 있었다. 먼지가 주렁주렁 들러붙어 축 늘어진 나무였다.
“저기 보이는 나무는 이름이 뭐예요?”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아가씨, 저 나무는 거지 나무예요.”
“거지 나무요?”
언니의 말에 나는 신기해서 되물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먼지를 잔뜩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빗자루로 청소해 주고 싶었다.
“저게 다 곰팡이예요.”
버지니아 센터빌에서 출발한 승용차가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서배너, 플로리다를 거쳐 마이애미에 도착하는 동안 내 눈에 가장 인상 깊게 들어온 것은 ‘거지 나무’였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패니시 모스
나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거지 나무’의 원래 명칭은 스패니시 모스(Spanish moss)다. 나무의 한 종류가 아닌 공중식물이며, 이 식물이 주로 자라는 나무는 떡갈나무와 삼나무란다.
스패니시 모스는 공기 중의 습기와 영양분을 흡수하여 살아가기에 나무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다만 너무 많이 자라면 빛을 차단해 나무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고 가끔 무거워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도 한다.
참 재미있는 식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물은 주로 미국 남동부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우리가 향하는 곳이 남쪽이라 눈에 자주 띈 것이다.
버지니아에서 키웨스트(Key West)까지는 20시간, 쉬지 않고 운전해도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는 쉬엄쉬엄 가기로 하고 가는 길에 이틀을 호텔에서 묵었다.
삼 일째 되는 날 아침, 아이들은 좀이 쑤시는지 몸을 들썩였다. 함께 여행을 나선 오빠 부부는 앞 좌석에 앉고 나와 아이들 둘은 뒷좌석에 앉았다.
SUV 차량이라 좌석이 비교적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어른 셋이 앉아 장거리 여행을 하기에는 약간 비좁았다. 특히 가운데 자리가 불편해 우리는 돌아가면서 그 자리에 앉았다.
마이애미 이정표
드디어 마이애미 이정표가 보였다. 키웨스트로 가는 길은 US 1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데,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그 1번 고속도로의 시작점이 바로 키웨스트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데만 두 시간 넘게 걸릴걸?”
운전대를 잡은 오빠가 말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거리네.”
바다를 2시간이나 달릴 수 있는 다리라니, 건설하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지 궁금했다.
승용차가 다리 위로 들어서자 일행 다섯 명의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왕복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왼쪽은 대서양이고 오른쪽은 멕시코만이다.
‘오버시즈 하이웨이(Overseas Highway)’라 불리는 이 고속도로는 43개의 섬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다리 길이는 240km로 중간에 플로리다 키스(Florida Keys)로 연결하는 기착지에 내려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2차선이라 차가 고장 나면 길이 많이 막히겠네.”
“맞아. 운이 나쁘면 온종일 걸리기도 한다고 들었어.”
내 말에 오빠는 정말 그런 일도 있었다며 거들었다.
‘오버시즈 하이웨이’ 오른쪽에 또 다른 다리가 보였다. 원래 처음 건설된 다리인데 1935년 허리케인으로 중간 부분이 끊겼다고 한다.
오버시즈 하이웨이
가는 도중 마음에 드는 곳에서 잠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오빠는 차를 세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키웨스트 안에서 둘러볼 곳이 많았기에 쉬지 않고 달렸다.
키웨스트는 미국 플로리다주 최남단에 있는 작은 섬이자 도시다. 이곳은 천혜의 자연경관과 함께 독특한 문화와 역사로 유명하다. 특히 아름다운 해변과 청록색 바다, 이국적인 분위기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러나 키웨스트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곳에 살았던 전설적인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키웨스트의 고요한 바다와 활기찬 항구를 보며 영감을 얻어 글을 썼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낚시와 사냥, 그리고 글쓰기에 몰두했다.
키웨스트는 섬의 길이가 6.4km, 폭이 2km, 면적은 11 km²로 작은 섬이다. 어른 걸음으로 2~3시간 걸으면 섬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사람들이 키웨스트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미국 본토 최남단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서던모스트 포인트(SOUTHERNMOST POINT) 조형물인 부표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부표가 있는 지점에서 불과 90마일(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쿠바가 보인다고 했다.
키웨스트를 한 바퀴 도는 관광버스
부표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200여 명은 되어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때때로 지나가는 관광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닭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키웨스트 거리에는 닭이 활개치고 다녔다. 가끔 어미 닭이 병아리를 몰고 가면 사람들의 시선은 닭에게 쏠렸다. 우리나라 토종닭과 비슷한 커다란 닭이 도로를 휘젓고 다녔다. 차들도 대부분 닭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주었다. 거리에 닭에 관한 안내문이 있었다. 키웨스트 시청 또는 동물 보호 단체에서 필요한 허가를 받으면 닭을 분양받아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단, 먹으면 안 된다는 조항에 사인해야 한다는 문구가 있어서 웃었다.
커다란 닭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차례가 왔다. 우리는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을 빠르게 찍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난간을 넘어 들어와 아무렇지 않은 듯 사진을 찍어댔다.
사람들은 인상을 쓰기는 했으나 아무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인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여행의 여유랄까? 뭐 그런 평화스러움을 느꼈다. 왠지 여행지에서는 다 용서가 되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바다 바로 옆에 세워진 미국 본토 최남단을 알리는 부표.
먼 길을 달려 미국 최남단에서 사진을 남기는 목표를 달성한 오빠 부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헤밍웨이 하우스로 향했다.
부표에서 하우스까지는 5분 거리였다. 날이 더워서 아이들은 겉옷을 벗었다. 아침에 남편과 카톡 할 때 한국의 날씨는 영하 15도, 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반 팔 차림이었다.
헤밍웨이 하우스와 박물관(Hemingway Home and Museum)
헤밍웨이 하우스는 찾기 쉬운 길가에 있었다. 1월 초라 휴가철도 아닌데 사람이 어찌나 붐비는지 입구에서 입장권을 사는데도 줄이 길었다. 입장료는 어른이 18달러, 어린이는 7달러, 우리는 어른 5명이라 모두 90달러를 냈다. 인터넷 예매는 되지 않고 현장 예매와 현금 결제만 가능하다.
헤밍웨이 하우스 입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0~30분이 소요되는 가이드 투어는 15분 간격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가이드를 따라다니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각자 흩어져 관람하고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헤밍웨이 생애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는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는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하고, 짧고 명확한 문장을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했다. 특히 그의 작품은 현실주의적이며 진실성을 강조했는데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 사랑, 죽음, 생존 등 인간의 본질적 문제들을 탐구했다.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오 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성악가로 부유하고 교양 있는 부모였다.
어린 시절부터 시카고 외곽에서 성장하며 자연과 스포츠를 즐겼고, 이는 그의 문학적 주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등학교 졸업 후, ‘캔자스 시티 스타’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글쓰기의 기초를 닦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사로 복무했다. 이때 부상을 당해 전후 회복기를 거치며 작가로서의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파리에서 거주하며 ‘잃어버린 세대’ 문인들과 교류했다. 헤밍웨이의 첫 주요 작품은 단편소설 모음집 <우리 시대에>(1925)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 <무기여 잘 있거라>(1929), <킬리만자로의 눈(1936)>,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노인과 바다>(1952) 등이 있다.
<노인과 바다>로 그는 1953년 퓰리처상을, 1954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헤밍웨이는 네 번 결혼했고, 많은 여행과 모험을 즐겼다. 그러나 말년에는 건강 악화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961년 7월 2일,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 하우스
헤밍웨이 하우스 전경
헤밍웨이 하우스는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1930년대에 헤밍웨이가 10년간 거주했다고 한다. 스페인 식민지 스타일의 이 집은 당시의 가구와 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층에는 거실과 주방,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거실은 헤밍웨이가 친구들과 가족을 만났던 공간이다. 헤밍웨이가 수집한 예술 작품과 그가 사용한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헤밍웨이 서재
2층에는 서재와 침실, 게스트룸이 있었다. 헤밍웨이 서재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
<노인과 바다>는 1951년 쿠바에서 쓰였는데 서재에 보이는 원탁 탁자 위 타자기로 작성되었다. 타자기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헤밍웨이가 눈앞에 그려졌다. 책장에는 살아생전 그가 읽고 영향을 받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고 벽에는 여행 중에 수집한 기념품들이 걸려 있었다.
헤밍웨이는 열렬한 사냥꾼이었다. 사냥 기념품들과 동물 머리는 아프리카 사파리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킬리만자로의 눈>을 떠올리게 했다.
낚시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헤밍웨이는 낚시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작품에서도 낚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곳에 전시된 낚시 도구들은 작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한다.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
침실은 헤밍웨이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폴린이 사용했는데 가구와 개인 소지품들이 보였다. 침대에는 검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외 복도에는 헤밍웨이의 초상화와 그동안 상영되었던 영화들의 포스터 등 그를 오롯이 느낄 만한 많은 전시품이 걸려 있었다.
복도에 걸려있는 헤밍웨이 초상화
1층과 2층을 다 돌아보고 나면 뒤쪽 복도를 통해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이 짜여 있었다.
정원에는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보였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덩굴 식물인 부겐빌레아(Bougainvillea)가 정원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또 열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색깔의 꽃 히비스커스(Hibiscus)도 많았다. 그리고 야자수는 정원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재미있는 일화를 남긴 수영장
정원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영장이었다. 이 수영장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 수영장은 키웨스트 최초의 인그라운드(땅을 파서 만든) 수영장으로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1930년대 후반, 헤밍웨이가 잠시 집을 비웠을 때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폴린 파이퍼가 수영장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수영장 건설 비용은 상당히 비쌌다. 특히 키웨스트의 열악한 지형과 더운 날씨로 인해 작업은 더욱 어려웠다. 수영장을 만드는 데 약 20,000달러가 소요되었다. 이는 당시 금액으로 엄청난 비용이었는데 지금의 가치로는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헤밍웨이는 폴린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다고 여겨 매우 화를 냈다.
“그동안 내가 모은 돈을 당신이 모두 써버렸으니, 이 마지막 1 페니나 가져!”
그는 주머니에서 1 페니를 꺼내 폴린에게 주며 소리쳤다. 그러자 1 페니를 받아 든 폴린은 그 동전을 수영장 콘크리트에 박아버렸다. 그때 콘크리트에 박힌 1 페니는 기념물이 되었다.
여기도 고양이 저기도 고양이 고양이가 정말 많았다.
헤밍웨이 하우스에는 유전적 돌연변이로 인해 발가락이 6개인 폴리닥틸 고양이가 있다. ‘폴리닥틸(Polydactyl cats)’은 그리스어에서 ‘많은’을 의미하는 ‘폴리(poly)’와 ‘손가락’을 의미하는 ‘닥틸(dactyl)’이 합쳐진 단어로 특히 앞발에 많다.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 살았던 시절, 선장 친구로부터 첫 번째 폴리닥틸 고양이를 선물로 받았다. 이 고양이의 이름은 ‘스노 화이트(Snow White)’였다. 이때부터 헤밍웨이 하우스는 폴리닥틸 고양이의 서식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고양이는 현재 약 40~50마리 정도로 키웨스트의 명물이기도 하다. 고양이들은 헤밍웨이의 집 안과 정원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고양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고양이에 대한 그의 애정은 매우 각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