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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치마바위-2편

이상적인 정치, 현실의 벽에 부딪치다-중종과 조광조

by 김인숙


신 씨의 복위를 원하지 않았던 중종


인왕산 치마바위 1편을 보면 중종은 쫓겨 난 신 씨가 그리워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 신 씨가 걸어둔 다홍색 치마를 보고 그리움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왕산 치마바위


세월이 흐르면서 중종은 새로 맞은 장경왕후와 후궁들에 둘러싸여 신 씨를 잊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종 10년째 되는 8월, 신 씨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상소문이 올라온 이유는 신 씨 이후 맞이했던 왕비 장경왕후가 아들 인종을 낳고 죽었기 때문이다.


중종과 장경왕후 혼례식(드라마 여인천하)


폐비 신 씨의 복위를 간한 담양 부사 박상 등의 상소문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옛 왕비 신 씨(愼氏)가 물리침을 입어 밖에 있은 지 이제 거의 일기(一紀)가 됩니다. (중략) 옛말에 이르기를 ‘빈천할 때 사귄 벗은 잊어서는 안 되고,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버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신 씨가 대저(代邸)에서 술과 장을 담그고 쇄소(灑掃)를 받든 지 무릇 몇 해였습니까? (중략) 이제 장경왕후께서 돌아가시고 곤위(壼位)가 다시 비었으니, 정히 도로 바로잡을 기회이고 또 구언(求言) 하시는 때를 당하였으니, 이러므로 신 등이 급급히 아뢰는 바입니다. <중종실록 22권, 중종 10년 8월 8일 임술 1번째 기사>


상소를 읽고도 중종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단경왕후의 복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신 씨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이 있었다. 중종은 얼마 후 상소를 올렸던 대신들을 유배 보냈다.


이후 중종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센 여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여인, 문정왕후를 새 왕비로 들였다.


중종과 문정왕후(드라마 여인천하)


반정공신만 130명, 10년 동안 허송세월한 중종


중종은 즉위 이후 연산군 때 중단되었던 경연을 실시하고 홍문관과 사간원 등 언론기관을 복구시키는 한편 불필요한 금표를 모두 해제시켰다. 연산 시절의 모순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오, 갑자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은 신원되었으며, 연좌되어 옥살이하는 이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억지로 빼앗겼거나 팔았던 집을 되돌려 받으면서 백성들은 이제 두 다리 뻗고 편히 살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연산을 등에 업고 온갖 권력을 누려오던 총신들이 곧 벌을 받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반정에 참가했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공신의 반열에 오르며 연산 때와 똑같은 권세를 누렸다.



중종 어진


반정의 진짜 주역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하로서 임금을 몰아내고 반역을 꾀했다는 오명을 덮어쓰고 있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어느새 반정공신의 수는 130여 명에 이르렀다. 반정의 낌새를 눈치채고 참가 의사를 밝힌 대신들은 모두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혹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 대신들도 가족과 친척이라는 이유로 하나둘씩 공신의 명단에 추가되었다.


이때 어부지리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자를 노와공신(怒臥功臣)이라 했는데 여러 가지 연줄로 인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미 연산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재정이 바닥난 상태에서 공신들에게 지급될 정전도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이처럼 공신 천하가 되다 보니 왕 위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도록 중종은 소신껏 일을 하지 못하고 공신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해야 했다.


어떻게든 이들을 물리치고 새로운 탈출구를 얻는 일, 그것이 중종이 넘어야 할 산이고 과제였다.


스승 김굉필과 조광조


중종의 정치가 탄력을 받게 된 것은 풍운아 조광조(趙光祖)의 등장 이후였다. 조광조는 중종 5년(1510) 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출입하였다.


중종은 어떻게든 연산의 악정을 타파하고 공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염원으로 중종은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을 장려했는데 바로 이 정통 성리학을 계승한 선비가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1482년(성종 13년) 8월 10일 한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옳지 못한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그는 17살 때 아버지가 평안도 어천(영변) 찰방(현재의 철도 역장)으로 떠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이 인연이 되어 귀양 온 대학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김굉필은 평소에도 늘 의관을 갖추어 입었고,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일어나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 밤늦게까지 학문에 전념했다. 그리고 부인 이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정치를 물으면 “소학을 읽는 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를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그는 '소학동자'라 불렸다.


“여러 글을 읽었어도 모든 조화를 이루는 하늘의 이치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을 읽고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하게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굉필은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김굉필 흉상과 책


1498(연산군 4)년 겨울, 외로운 귀양살이를 하던 김굉필은 조광조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첫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젊은이였다. 김굉필은 조광조의 인물 됨됨이를 꿰뚫어 보았다.


김굉필은 어렴풋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학문을 전수해 줄 만한 인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원하고 있을 무렵, 조광조가 찾아온 것이다.


김굉필은 소학을 비롯하여 경학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학문을 체계 있게 조광조에게 가르치고 이해시키려 애썼다.


고대의 성인, 현인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고 그것을 터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경학인데 경학은, 유가(儒家) 고전의 해석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소학은 경학 연구에 필요한 학문으로 김굉필이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이었고 조광조도 매료되었던 학문이었다.


조광조는 김종직, 김굉필의 학풍이 옳다고 여겼다. 후일 조광조가 내세운 도학에 입각한 정치사상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훤당 김굉필 친필


어느 날, 효심이 지극했던 김굉필이 모친에게 보내기 위해 꿩고기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고양이가 냉큼 고기를 물고 도망치자 김굉필은 심하게 여종을 나무랐다. 이를 지켜보던 조광조가 말했다.


“스승님,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절실하지만, 군자의 사사로운 화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소자는 스승님이

이처럼 화를 내시는 것이 과연 합당한 지 감히 마음에 의문이 듭니다.”


이 말을 들은 김굉필은 조광조의 손을 잡았다.


“나도 화를 낸 뒤 스스로 뉘우치고 있던 참인데 네 말이 이러하니 부끄럽구나.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


아버지의 임기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학자 스승에게 배우고자 하는 조광조의 열망은 식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그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1504(연산군 10)년 10월, 갑자사화가 일어날 즈음 조광조의 나이는 23살이었다. 갑자사화의 여파로 스승 김굉필은 결국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김굉필은 1517(중종 12)년 정광필, 신용개 등에 의하여 무고하게 죽었음이 밝혀져 우의정에 추증(죽은 후 공적을 인정받아 벼슬이 올라감)되었고, 후일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오현(五賢-다섯 명의 어진 현자)’으로 문묘에 올랐다.


저서로는 <경현록>, <한훤당집>, <가범>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굉필 책


다행히 연산의 폭정은 오래가지 않아 끝이 났고 마침내 조광조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1510(중종 5)년 사마시에 합격한 조광조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했다.


1515(중종 10)년, 그는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의 천거를 받은 데 이어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정 6품의 선무랑에 올랐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1515(중종 10)년 초가을, 조광조는 대과에 응시해 차상으로 급제했다.


세 번째 왕비 간택령


조광조가 대과에 급제할 그즈음, 궁궐은 세 번째 왕비를 간택하는 문제를 놓고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왕세자 호(岵-훗날 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장경왕후는 죽기 직전 중종에게 부탁했다.


‘지난여름 임신 중 꿈에 선인이 나타나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지으라고 했습니다. 벽에 기록해 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종이 벽을 보니 과연 ‘억명’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후일 인종이 되는 장경왕후 아들(여인천하)


장경왕후는 아마도 아들 인종이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예지몽을 꾼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중종은 아들의 이름을 억명이라 짓지 않고 ‘호(岵)’라 지었다. 만약 인종이 장경왕후의 말대로 억명이라 지었다면 인종이 오래 살 수 있었을까? 그 진의는 알 수 없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은 지 3개월이 지나도록 교태전을 비워두었으나 주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물밑 작업은 이미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중종에게는 여러 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중전의 후보로 물망에 오른 후궁은 박원종의 수양딸인 경빈 박 씨와 남양군 홍경주의 딸 희빈 홍 씨 두 사람이었다. 두 빈에게는 각각 아들이 있었다.


희빈 홍 씨와 경빈 박 씨(여인천하)


후일 조광조가 위훈 삭제를 주장하며 훈구파를 몰아내려 했을 때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 앞장선 여인이 바로 희빈 홍 씨였다.


사림의 영수였던 조광조는 늘 바르게 행동하면서 정치의 혁신을 추구하였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등 빈틈을 보이지 않아 모함하는 게 쉽지 않았다.


희빈 홍 씨는 아버지 홍경주가 시키는 대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 씨가 왕이 된다’라는 네 글자를 새겨 벌레가 이를 파먹게 한 후 그 나뭇잎을 이용하여 조광조를 모함하였고, 뜻대로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경빈 박 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 계략을 꾸미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고 희빈 홍 씨는 1545년 윤여해, 윤희령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대간들로부터 심한 탄핵을 받고 사가로 쫓겨나갔다. 소생으로 금원군과 봉성군을 두었다.


폐비 단경왕후를 복권시키려는 상소


두 여인이 교태전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동상이몽을 꾸고 있을 때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폐비 신 씨를 중전으로 맞이하자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상소를 올린 신하를 유배형에 처했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나라에는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 며칠씩 사라지지 않는가 하면, 우박이 떨어지기도 했고, 전라도 낙안군에서는 발이 다섯 개인 기형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했다.


대신들은 경빈과 희빈에게 이미 아들이 있어 세자를 키우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새 궁전을 들이자고 주장했고 결국 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대비전에서는 간택령을 내려 궁 밖에서 중전을 물색했다. 물망에 오른 네 명의 여인 중에서 교태전을 차지한 인물은 열일곱 살, 윤지임의 딸이었다.


세 번째 왕비에 오른 문정왕후는 후일 어렵게 낳은 자신의 아들 명종을 위해 착한 효자 인종을 괴롭혔으며 끝내 인절미를 먹여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문정왕후(여인천하)


그 사이 중종의 눈에 띈 조광조는 경연을 통해 그동안 연구하고 다듬어온 자신의 이상을 강의했다. 반듯한 몸가짐과 깊이 있는 학문, 뛰어난 언변으로 인해 날이 지날수록 중종은 조광조를 더욱더 신임했다.


중종은 조광조에게 매료되어 경연을 늘렸으며, 심지어 하루에 네 번씩이나 열리는 경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조광조는 홍문관 부수찬으로 관직에 들어선 후 수찬, 부교리, 교리, 직제학을 거쳐 홍문관의 수장인 부제학에 오르기까지 채 2년이 걸리지 않았다.


조광조가 부제학에 올랐을 때 그의 정치적 힘은 3 정승을 능가할 정도였다. 조광조는 만조백관들이 결정한 여진 토벌을 혼자 반대하여 중지하게 만들었고, 판서 고형산이 거만하게 굴자 그 부하를 잡아서 옥에 가두기도 했다.


어느 정도 힘이 모아졌다고 판단한 조광조는 그동안 생각했던 여러 가지 개혁 사항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그의 개혁안에는 그 당시 조선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대공수미법과 종모법 실시 등 혁신적인 요소가 많았다. 개혁안은 실시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안은 결국 숙종, 영조 대에 이르러 실시되었다.


조광조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데 앞장섰다. 소격서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조선왕조에는 소격서 외에도 유교적인 제례가 널리 성했다.


조광조는 상소를 올려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중종은 쉽게 이 일을 결정하지 못했다. 한 달이 넘도록 왕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조광조는 조선의 정치가 아직도 성리학의 기초 위에 있지 않음을 역설하고 신랄하게 중종을 비판했다.


이후 홍문관에서는 일곱 차례나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했고 조광조 역시 다섯 차례나 주장을 반복했다.


1518년 8월, 마침내 소격서 문제로 전 대간이 사직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종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소격서 폐지 문제에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결국 중종은 대간을 모두 교체하는 일이 있어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간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자 중종은 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니 대간을 모두 교체 발령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발 물러섰던 대간들은 다시 벌떼처럼 일어나 ‘왕이 언로를 막으며 왕의 권위로 무리하게 일을 처리한다’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성균관 생원들도 나섰다. 사실 소격서는 그동안 계속 있어왔던 것으로 긴급히 폐지해야만 할 이유도, 그렇다고 폐지를 결사적으로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조광조는 이 일을 계기로 소격서를 폐지하고 성리학을 유일사상으로 뿌리내리고 싶었다. 결국 이 일은 시간을 끌다 소격서를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정리되는 듯했다.


“소격서를 혁파하되 건물은 헐지 말고 다른 용도로 쓰게 하라.”


결국 중종이 백기를 들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대간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이 일로 중종과 조광조 사이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그동안 조광조를 아끼던 중중이 그를 경계하게 된 것이다. 조광조가 아무리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끊임없이 왕권에 도전하는 신하를 곱게 보아줄 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조광조는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는 현량과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현량과는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를 줄인 말로, 천거과(薦擧科)라고도 불렀다.


조광조(여인천하)


조광조는 과거제도가 문장의 수려함과 문벌에 치중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한(漢) 나라의 현량과를 본떠서 시험을 보아 채용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성균관, 예문관, 중추부, 육조, 한성부, 홍문관 등과 지방에서 쓸만한 인물들이 천거되었고 이들 120명은 왕이 보는 가운데 근정전에서 시험을 치르고 그중 28명을 뽑았다.


그러나 현량과는 처음부터 조광조와 대립하던 구세력의 반대가 심했고 합격자가 거의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여서 이후 훈구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후일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축출되자 현량과도 곧 폐지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내친김에 정국공신을 폐하여 조정의 권력구조를 완전히 바꿀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개혁이었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공신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으려고 덤비는 조광조와 그 무리를 더는 가만히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현량과가 실시되고 기묘사화가 일어나기까지는 불과 7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개혁을 지나치게 서둘렀기에 조광조는 스스로 목숨을 단축시킨 것이다.


조광조 평전(한겨레출판)


그로부터 얼마 후 대궐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궁궐 여기저기에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나뭇잎이 발견된 것이다.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 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말 아닙니까?”


대궐에는 곧 조 씨 성을 가진 자가 임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조광조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소문은 발도 없이 바람결에 궁궐을 뒤덮었고, 중종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종은 희빈 홍 씨가 내미는 나뭇잎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중종은 혈기왕성한 조광조가 좋았다. 그가 추진하는 일들이 다소 과격한 면이 있기는 하였으나 의욕이 앞서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고 조광조가 일을 벌일 때마다 조광조 편에 서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광조는 사사건건 자신을 꺾으려고 했다. 또 대신들은 물론 신진 사류들까지 모두 조광조의 뜻에 동조하고 걸핏하면 사직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점점 힘이 커지는 조광조를 볼 때마다 섬뜩했다.


조광조를 모함하는 희빈 홍 씨(여인천하)


‘언젠가는 저자가 나를 내쫓고 왕위에 오를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무렵 궁궐에 있는 벌레들까지 나서서 나뭇잎을 갉아 조광조를 지지하고 있었다. 중종은 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물론 조광조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이렇게 일을 만들어 조광조를 역모로 몰아붙일 때 모르는 척 조광조를 제거하고 싶었다.


중종은 마침내 비밀스러운 교지를 내렸다.


이날의 사건은 <승정원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편전에서 홍경주, 남곤, 김전, 정광필을 비밀히 불렀고 이장곤, 안당 등은 뒤에 있는데, 조광조 등을 조옥(詔獄)에 내릴 것을 의논하였다.


“이 사람들을 다 의금부에 하옥하라.”


명단에 적힌 사람은 승정원에서 숙직을 서던 승지 윤자임, 공서린, 주서, 안정, 한림, 이구와 홍문관에서 숙직을 서던 응교 기준, 부수찬 심달원이었다.


결국 윤자임 등은 모두 옥에 갇혔다.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금부(禁府)에 명하여 우참찬 이자, 형조판서 김정, 대사헌 조광조, 부제학 김구, 대사성 김식, 도승지 유인숙, 좌부승지 박세희, 우부승지 홍언필, 동부승지 박훈을 잡아 가뒀다.


뿐만 아니라 그날 밤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원이 모두 교체되었고 사관도 다 바뀌었다. 그래서 그날 밤의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조차 할 수 없었다.


“조광조와 김정은 죽이고, 김식, 김구는 곤장 100대를 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윤자임 등은 변방으로 보내라.”


이들이 지은 죄는 붕당죄였다. 붕당죄는 왕을 기만하고 사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함을 이르는 죄였다.


조광조는 체념했다. 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려는 일을 추진하면서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공신들이 똘똘 뭉쳐 임금께 간언 한다면, 이미 옥에 갇힌 자신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으랴? 그는 죽음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조광조는 마지막으로 중종에게 변명이라도 하고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광조는 왕명이 떨어지자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 죄인들을 실은 수레가 출발하자 수많은 유생이 몰려와서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귀양 가는 조광조(여인천하)


그 뒤 조정의 분위기는 조광조의 개혁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정국공신 개정은 취소되었고 현량과 급제자는 모두 파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14일에는 조광조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 땅에 귀양 온 뒤 집 북쪽 담을 헐고 하루도 빠짐없이 중종이 있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중종이 오해를 풀고 좋은 소식이 올 것을 기다렸으나 그를 찾아온 것은 사약을 받으라는 어명이었다.


조광조는 온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집에 있을 때도 하인들까지 모두 정성으로 대접하였으며, 분개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를 공경했다.


의금부 도사 유엄이 사약을 가지고 왔다.


“죽이라는 명만 있고 혹 죄인에게 남기는 글은 없소?”


조광조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유엄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광조는 중간에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일을 꾸미고, 혹 임금은 자신의 죽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만큼 그는 어리석게도 끝까지 중종을 믿었다.


조광조는 곧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글을 썼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백일림하토(白日臨下土)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글쓰기를 마친 후 조광조는 거느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마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이 말을 마친 후 조광조는 독한 술을 가져다가 마시고 사약을 먹고 죽었다.


<정암집>과 조광조 책(푸른숲주니어)


안타깝지만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조광조는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중종 10년 8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조광조의 나이는 34세였다. 그리고 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로 죽게 된 조광조의 나이는 38세였다. 불과 4년 동안 조광조가 한 일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오늘날 16세기 조선왕조를 이야기하는 데 빠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치적으로 지지 세력이 없었다. 중종은 사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조광조를 등용하였으며, 적극적으로 믿고 후원했다. 하지만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썼던 조광조는 현실적인 정치의 벽에 부딪쳤고 결국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조광조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 이이 등 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도봉서원(현재 새로 짓고 있고 터만 남아 있다)


조광조의 업적은 기묘사화가 끝나고 80여 년이 지난 후 비로소 재평가되었다. 그는 선조 초에 신분이 복귀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전하고 있다.




사실 조광조는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하다. 그러나 중종을 다루면서 조광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 최소한 요점만 간추려보았다. 아쉬운 점이 많지만 이 분량도 적은 분량이 아니라 이만 마무리한다.


*자료 및 사진-문화재청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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