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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황희, 청백리는 아니었다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황희 정승

by 김인숙

18년 간 영의정 재임한 황희


황희(黃喜, 1363년 3월 4일 ~ 1452년 3월 8일)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 사람으로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등 조선 개국 이래 다섯 임금을 모셨다.


그는 영의정 18년, 좌의정 5년, 우의정 1년 등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황희는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즉 그가 맡은 업무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각부 장관을 비롯하여 평안도지사, 서울특별시장, 국무조정실장, 감사원장 등이었다.


이렇게 국정 전반에 모르는 것이 없으니 태종과 세종이 신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채용신이 그린 황희


그는 청백리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업적 또한 많다. 농사 개량으로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했다. 또한 북방 야인과 남방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했다.


천첩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인권에도 힘썼다. 그 외에도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진흥에도 앞장섰다. 즉 경제, 안보, 인권, 외교, 문화 등에 관여한 훌륭한 지도자였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계는 정권을 잡은 후 고려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 유신들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고려의 유신들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복(朝服)과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초립을 쓴 다음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서두문동에서는 72인의 선비가, 동두문동에서는 48명의 무인이 자리를 잡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그들은 마을 입구에 사립문을 설치하고 문 옆에 가죽 채찍을 하나 걸어두었다. 과거를 보려는 자는 채찍을 맞고 나가야 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의 옛 지명이다.


태조는 고심 끝에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두문동에 불을 질러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오는 사람에게는 벼슬자리를 주고 살기 편하도록 모든 것을 제공해 주며 충신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잔혹한 선택이었지만, 태조는 새로운 왕조의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밖에서 곧 불을 붙인다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전 두문동 충신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그 속에 훗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황희가 끼어 있었다. 충신들은 황희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황희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종용했다.


황희는 거절했으나 누군가 살아남아 우리의 충절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말에 두문동을 빠져나와 전라도 장수로 몸을 숨겼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렀고 끝까지 고려 신하를 불사하던 이들은 불에 타 죽었다. 이성계는 그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불을 질렀지만, 선비들은 불길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끝까지 버티던 이들 중 맹호성, 조의생, 임선미를 두문삼절(杜門三絶)이라 부른다.


이성계는 두문동 사람들을 미워해 개성 선비에게는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했다.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할 수 없이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개성상인이 탄생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황희의 어진


두문(杜門)이라는 말 자체가 '문을 닫아건다'라는 뜻으로, 이 표현은 이규보의 편지글과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두문동에 은거하다 숨진 72현에 대한 기록은 조선 순조 때 72인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정리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 책자로 전해지고 있다.


세종의 총애


세종은 황희를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했다.


황희는 영의정이 된 1431년부터 1449년에 이르기까지 사직상소를 수시로 올렸으나 무려 20년 가까이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종대왕 어진


황희가 나이 들어서 회의 시간에 서 있기 힘들다 아뢰니 앉아서 하라고 했고, 말 타고 다니기 힘들다 하니 가마를 내려주었다. 출근도 힘들다 하니 그렇다면 출퇴근할 시간도 아낄 겸 집에서 누워서 재택근무를 하라고까지 했다.


결국 황희가 은퇴하는 데 성공한 시기는 1449년 10월, 세종이 붕어하기 4개월 전이었다.


세종은 유난히 황희를 부려(?) 먹었다. 황희가 모친상을 당하자 3년 상을 치르지 못하게 했다. 명목은 그의 건강이 상할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어명을 내렸다.


“환갑 지나면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좌상이 풀때기만 먹다가 건강을 해치면 큰일이니 고기를 먹으라.”


황희는 어명이라 어길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반찬을 먹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황희의 비리 사건


사실 황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청렴결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딸 하나와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자녀들과 연루된 사건들이 많았고 이를 감싸기 위해 황희가 저지른 죄도 부지기수다.


물론 세종도 황희의 죄를 알고 있었다. 솔직히 황희는 세종에게 약점을 잡혀 끝까지 세종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일을 했을 확률이 높다.


황희는 대쪽 같고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가족의 잘못에는 그 잣대를 무너뜨렸다. 대표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다.


방촌 기념관


살인한 사위 죄 덮어

어느 날, 황희의 사위 서달이 시골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달아나자 기분이 상했다.


그는 감히 좌의정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인 자신을 몰라봤다고 분개하며 종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라 일렀다.


AI가 그린 그림


종들이 길 가는 다른 아전을 잡아 패며 달아난 아전의 집을 안내하라고 하자 마침 지나가던 또 다른 아전 표운평이 이를 보고 항의했다.


종들은 느닷없이 표운평을 때려서 서달 앞으로 끌고 갔다. 길 가다 몰매를 맞은 그가 너무도 황당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서달은 그가 일부러 말을 안 한다고 생각하여 소리 질렀다.


“저놈이 낮술을 했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


종들이 명령대로 달려들어 작대기로 그를 마구 때리니 표운평은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다.


AI가 그려준 그림


현감이 사건의 전말을 수사하다 보니 용의자가 서달이었다. 그런데 그의 부친과 장인이 워낙 고위직이다 보니 현감은 직속상관인 충청도 관찰사와 조정에는 함구한 채 황희에게 먼저 정황을 알렸다.


서달의 아버지 서선과 황희는 사건을 은폐했다. 그런데 은폐행각이 기가 막혔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고 일의 처결을 맡은 지역 수령에게 압력을 가해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도중에 가로챘다.


또 주변과 입을 맞춰 서달은 은근슬쩍 묻히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 그의 노비가 범인이라고 다 뒤집어썼다. 이를 위해 조작에 가담한 관리가 수십 명에 달했다.


그런데 우리의 세종 대왕이 어디 그렇게 허술한 분인가? 세종은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어본 후 이상하다고 여겨 의금부에 재조사를 명했고 결국 모든 진상이 밝혀졌다.


세종대왕 동상


황희와 서선은 긴급 체포되어 파직당했다. 일을 함께 도모한 형조 참판과 대사헌은 유배에 처해지고 지방 현감 6명은 곤장 1백 대를 맞고 변방으로 추방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서달은 사형이었는데 독자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 3천 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 3년 노역 치 벌금 납부라는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 외에도 황희는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주기 위해 구차한 변명으로 세종에게 호소해 이들을 구해 준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장남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달라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와 같은 행동을 보면 황희는 자식과 친인척의 비리에 대해서는 눈감고 귀를 막은 듯하다.


황희의 서자, 궁중의 금잔을 훔치다


황희에게는 여종에게서 난 서자 황중생이 있었다. 그는 세자궁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금잔을 훔치다가 적발되었다.


그런데 심문 과정에서 황중생은 황희의 차남 황보신은 더 많이 훔쳤다고 고했다.


황보신을 잡아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이에 황보신의 땅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또 재미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이 동생 황보신의 기름진 밭을 자신의 돌밭과 바꾼 것이 드러난 것이다. 사문서 위조였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에서나 있을 범죄가 황희 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황희는 너무 화가 나서 서자 황중생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며 성을 조 씨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처신이었다. 사실 더 많은 죄를 지은 아들 황보신은 두둔하면서 황중생만 족보에게 파버린 것이다.


둘째 아들이 물건을 훔친 이유는 첩에게 선물로 주기 위함이었는데 덕분에 장물을 받은 첩도 같이 잡혀갔다.

세종도 너무 기막힌 황희 집안의 일을 덮어주지 못하고 장남 황치신까지 파면시켰다. 황희의 두 아들과 서자까지 절도에 문서위조까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였다.


후일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막내 황수신은 황희의 후손이라는 덕을 보아 영의정까지 올라 가장 크게 되었다.

그런데도 5년 후 황희를 용서한 세종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황희를 크게 기용했는데 이는 황희가 꼭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황희의 잘못을 들추기 위함은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황희와 너무 다른 그의 범죄행각이 조선왕조실록에 버젓이 실려있기에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황희의 성격과 그의 품성은 나무랄 데 없었다. 다음은 그의 아름다운 일화들을 전한다.


음덕을 쌓아 오래 살게 된 황희


황희가 출세하기 전에 한 점쟁이가 예언하였다.


“대감은 앞으로 좌의정이 될 것이며 수명은 70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황희는 영상이 되고 90살이 되어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어느 날 그 점쟁이가 찾아와 말했다.


“제가 사람을 수없이 점쳐 왔으나 단 한 번도 틀림이 없었는데 황희 선생에게는 영험이 없으니 반드시 음덕(陰德)을 쌓은 까닭입니다.”

“나는 전혀 그런 일이 없네.”


황희가 부인하였다.


“제발 숨기지 마소서.”


그러자 황희가 말했다.


“내가 음덕을 쌓은 일은 절대로 없네. 다만 소시에 어느 시장을 걸어가는데 무슨 물건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보니 한 짝의 금잔으로 기이하게 생겨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서울 문에다 아무 날 아무 시간에 물건을 잃은 사람은 아무의 집으로 오라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찾아와서 금잔을 잃었다고 말하더군. 바로 금잔을 내어주었더니 그 사람이 절하고 감사해하면서 말했네.”


“이 금잔은 어공소(御供所)의 소유로 궁중에는 이 금잔 한 쌍밖에 없어 다른 그릇과는 각별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수라를 올릴 때 한 잔씩 바꿔가며 사용하는데 마침 내시를 통하여 몰래 가져다가 사위 맞는 잔치에 잠시 사용하고 반납하러 오다가 길에서 분실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웠다면 어찌 내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여 죽어도 마땅한데 분실까지 했다면 연좌되어 30여 명 일가족이 다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은덕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그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절하고 돌아갔네. 그런데 다음 날, 그가 멋진 준마를 선물이라며 가져왔기에 받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이 어찌 음덕이 되겠는가?”


방촌 기념관 전경


점쟁이는 매우 감탄하였다.


“그것이 바로 음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대감이 영상에 이르고 수명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일 것입니다.”


점쟁이는 곧 금잔을 분실하였던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그 아들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날마다 첫새벽만 되면 일어나 지성껏 황희 정승을 위해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수명은 90을 누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점쟁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어느 날 하인 두 명이 싸움을 벌이다가 황희가 나타나자 서로 자신이 옳고 상대가 잘못했다며 하소연했다.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난 황희는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네가 옳고, 저 애 말을 들어보니 또 저 애 말도 옳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말했다.


“아니, 이 애도 옳고 저 애도 옳다니요? 한나라의 정승이라는 분이 어찌 그리 사리 분별에 어두우십니까?”


그러자 황희 정승이 말했다.


“맞소. 듣고 보니 또 부인 말도 옳구려!”


황희는 집에 있을 때는 성품이 너무 너그러운 편이어서 평소에 부인이 말했다.


“이러한 분이 어떻게 재상의 중책을 맡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황희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방촌영당 전경


어느 날 입궐하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관복을 갖추었다. 황희는 관복을 입으면 집에 있을 때도 반드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침 부인이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여 다가오다가 위풍이 엄숙함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리둥절하였다. 부인의 거동을 본 황희 정승은 웃었다.


“이제야 재상임을 알았는가?”


그는 언제나 천성이 검소하여 재상 지위에 있은 지 수십 년이 지났으나 집안이 쓸쓸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볏짚으로 엮은 자리(멍석)에 기거하면서 이 자리가 가려운 데를 긁기에 매우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면 비가 새서 방 안에 그릇을 놓아두고 우산을 쓰고 있었다는 일화 역시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 황희가 받는 녹봉이 그리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희의 집은 여느 벼슬아치들과 다를 바 없이 크고 아름다운 기와집이었다.


다만 황희의 온화하고 관대한 성품은 야사에서도 잘 나타나며 노비의 아이가 황희 정승의 수염을 잡아당겨도 혼내지 않고 그저 허허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방촌영당 황희 영정


계란유골(鷄卵有骨)


계란유골은 운이 나쁜 사람이 좋은 기회를 얻어도 일이 틀어지는 상황을 비유하는 속담이다.


청렴하기로 이름난 재상 황희는 집이 가난해 먹을 것이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명했다.


“오늘 하루 남대문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모두 황희 대감께 가져다 드려라.”


그런데 그날 하루 종일 큰비가 내려 남대문으로 통행하는 물품이 없었다. 저녁 무렵 겨우 계란 한 꾸러미가 들어와 황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먹으려고 계란을 깨보니 모두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 역시 청빈한 삶의 극단을 보여준 일화다.


AI가 그린 그림


농부의 교훈


하루는 황희가 적성에서 송경으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이 누렇고 까만 소 두 마리로 밭을 갈다가 막 쟁기를 떼어 놓고 나무 밑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 공도 그 옆에 말을 쉬이며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저 두 마리 소는 다 살찌고 건장한데, 밭갈이할 때 힘에는 우열이 없소?”


그러자 노인이 입을 공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AI가 그린 그림


누런색 빛깔의 것은 쓸만하고 까만 소 빛깔의 것은 뒤지오.”

“소가 무엇이 그리 꺼려서 이처럼 속삭이는 것이오?”

“답답하오. 손님이 아직 연소하여 물정을 모르는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과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말의 좋고

궂은 것은 환히 짐작하므로, 만약 자기가 못나서 남에게 뒤진다는 말을 듣는다면 불만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사람과 다를 바가 있겠소?”


공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였다. 공의 한평생 겸손하고 인후한 덕량은 그 농부의 한마디 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공은 농부의 가르침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말조심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죽어서도 황희


한 번은 명나라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새 한 쌍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 새를 키워서 보내라고 했는데 새는 어떤 것을 주어도 먹지를 않는 것이었다.


조정 대신이 며칠씩 모여 상의했으나 별 묘안이 없었다. 이때 한 신하가 품하기를 황희 정승께서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니 생전에 무슨 말을 남긴 것이 없나 알아봄이 어떠하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남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돌아가시려 합니까? 하니, 황정승 말씀하시기를, 공작도 거미줄을 먹고사는데 산 사람 입에 설마 하니 거미줄이야 치겠소?”


이 말을 듣고 곧 거미줄을 걷어다 먹였더니 사경에 이르렀던 새는 그 거미줄을 주는 대로 먹고 잘 자라는 것이었다.


AI가 그린 그림


얼마 후 명나라 사신이 와서 죽은 줄만 알았던 공작이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는 본국에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니 명나라 황제는 감탄하며 말했다.


“황희가 세상을 떠나 조선에는 명인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그만한 인물이 또 있구나!”


이후 명나라에서는 소국이라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보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이 보니 손재주가 뛰어난 종이 한 명 있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부탁하면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만들어냈다.


황희 정승은 명나라에 갈 때 그 종을 데리고 갔는데 바로 그가 장영실이다.


황희 정승은 장영실의 재능을 높이 사서 나중에 세종대왕에게 추천했고, 장영실은 명나라에서 본 것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놀라운 발명품들을 탄생시켰다.


평생 눈 관리에 힘써


황희가 늙도록 일을 많이 한 이유는 건강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 양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 하는 습관이 있었다. 독특한 시력 관리법인데 현대 의학에도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한다.


야사에는 황희가 째려보면 사람이고 어린 아이고 동물이고 다 움찔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죽어버리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수양대군과 맞섰던 김종서 장군도 평소 황희를 무서워해서 그 앞에서는 동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은퇴 후 황희가 어느 날 삽살개와 눈싸움을 했는데 개가 무서워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를 보고 황희가 한탄했다.


“나도 이제 갈 때가 되었구나.”


AI가 그린 그림


황희의 어록


나라의 근본은 오직 백성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本固邦寧)


백성에게 믿음을 잃고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없다.(未有失信於民而能治其國者也)


사람들이 분노하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고,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면 재변이 따른다.(人旣痛憤天必厭之天必厭之則災變隨之矣)


방촌영당(尨村影堂)


파주에 황희의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영당이 있다. 황희의 호를 따라서 지은 이름이다.

황희가 문종 2년(1452)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세조 원년(1455)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곳에 영당을 세우고 영정을 모셨다.


방촌영당에 있는 황희 영정


영당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에 직사각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솟을삼문


영당 주변에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반구정 정자

황희 연보


-파주 방촌영당(尨村影堂) 찾아가는 길-

*주소: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황희 선생 유적지-방촌 기념관



<조선왕조 실록> 황희 졸(卒)기(일부)

비록 늙었으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였으며, 항시 한쪽 눈을 번갈아 감아 시력(視力)을 기르고, 비록 잔 글자라도 또한 읽기를 꺼리지 아니하였다. 재상(宰相)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宰相)」이라 하였다.


늙었는데도 기력(氣力)이 강건(剛健)하여 홍안백발(紅顔白髮)을 바라다보면 신선(神仙)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송(宋) 나라 문 노공(文潞公)에 비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寬大)하여 제가(齊家)에 단점(短點)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처(妻)의 형제(兄弟)인 양수(楊修)와 양치(楊治)의 법에 어긋난 일이 발각되자 황희는 이 일이 풍문(風聞)에서 나왔다고 글을 올려 변명하여 구(救)하였다.


또 그 아들 황치신(黃致身)에게 관청에서 몰수(沒收)한 과전(科田)을 바꾸어 주려고 하여 또한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였다.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사람을 서자(庶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죄를 범하니, 곧 자기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변성(變姓)하여 조(趙)라고 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2월 8일 임신 1번째 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자료&사진*

방촌영당 홈페이지

한국관광공사

경기관광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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