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키우기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면 나와 오빠의 탄생은 어느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했다.
하물며 우리를 만든 부모라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엄마는 몸과 마음이 아파서 요양원에 가야 했다고 들었다.
나는 엄마와 태어나자마자 이별했고 엄마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기억조차
아니 어떠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는
생물학적 엄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중에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아빠한테 들었지만 그건 내가 충격받을까 봐 둘러댄 핑계였다.
내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여전히 엄마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갓난아이까지 돌볼 수 없게 되자 아빠는 우리 둘의 입양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아빠는 자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키운 거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느끼며
아빠가 과거에 우리들한테 한 일에 대해 서운함과 억울함을 토로할 때면
그래도 나는 너희들을 버리지는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당당해하셨다.
그렇게 오빠와 나는 큰 아빠집, 고모네집을 전전하며 키워지게 된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처럼 눈치를 보며 살게 되는 팔자였던 것이었다.
큰 아빠집에서 자랐을 때는 너무 아기 때라서 기억이 없지만
고모네집에서 살 때는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라 드문 드문 기억이 난다.
고모네집에는 사촌오빠랑 언니들이 있었고 오빠랑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눈치 보느라 맛있는 반찬이 있어도 못 먹고 숙제를 안 하거나 말대답을 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하면 머리를 맞고 많이 혼났던 기억이 끊겨서 나곤 한다.
나는 그때 어려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오빠는 초등학생 때여서 맞았던 기억들, 본인 자식들에게는 맛있는 걸 주고
우리에게는 맨날 시래기국만 끓여줬다면서 기억하기 싫어도 모든 기억들이
세세하게 다 나서 그 고모를 만나게 되면 옛날 기억이 올라와 힘들다고 했다.
아빠의 노동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우리는 일곱 살이 되서부터는
조그마한 방 한 칸에 공동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이사가게 된다.
그 뒤로 여러 명의 아줌마들이 우리 집에 거쳐갔다.
나를 안아줬을 때 났던 진한 화장품 냄새와 그 아줌마들이 입었던 화려한 옷들이 기억이 난다.
그중에 우리에게 제일 친절하게 대해준 아줌마가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오빠는 너무 화가 나서 벽에 있는 거울을 손으로 깨버렸다.
나의 어린 시절 시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인지
살기 위해서 내 무의식은 기억들을 조금씩 지워 모든 기억들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 당시의 자세한 상황보다 그 당시 내가 얼마나 슬프고 좌절했는지
감정의 종류와 강도만이 기억이 난다.
여덟 살 때 지금까지 아빠랑 살고 있는 새엄마를 만나게 된다.
숱한 엄마들이 아빠의 폭언, 폭행, 술주정으로 참지 못하고 우리를 떠났기에
오빠랑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나는 항상 웃으면서 대하려고 노력했고
엄마가 오는 날에는 예쁘게 과일을 깎아서 그릇에 내놨으며
최대한 눈치를 보며 싱글벙글 갖은 애교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생존의 한 방법이었던 거였다.
새 엄마 쪽에는 이미 결혼한 두 딸과 고등학교 아들, 딸이 있었다.
엄마는 왔다 갔다 하면서 두 집 살림을 하다가
우리 집으로 고등학생 막내딸을 데리고 같이 살게 된다.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깔끔했던 엄마의 비유를 맞추고자 눈치껏 각종 집안일을 도왔고
아프다고 하면 다리 주무르기, 약 사다주기등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한 거 같다.
학교에서는 밝은 척 쾌활한 척 연기를 했고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우등생으로 각종 임원을 하며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환영받는 아이로 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착된 눈치 보는 행동은 성인이 되서도 계속되며 나를 힘들게 했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데도 누구를 만나거나 연애를 하게 되면 내가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이 사람이 날 떠나면 어쩌지 조바심이 나고 불안했다.
그런 기색이라도 보이면 상처받기 싫어서 내 쪽에서 먼저 관계를 차단했다.
상대편이 조금이라도 표정이 안 좋으면 실제 상대방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 때문이라고 단정 지으며 잘못된 억측을 했고 나만의 잘못된 시각의 문제로
상황을 자꾸 불리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만나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신경 쓰느라 정작 나는 즐기지를 못했고
긴장 속에 있으니 사람을 만나고 집에 오면 기가 빨려서 진짜 친한 사람 아니고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에게 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나한테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하거나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받아치는 용기는 없으면서
집에 와서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분노를 느꼈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나의 생각들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조금이라도 뭐가 맘에 안 들면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걸로 단정하고 미리 그 사람과 선을 그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는 유년기의 외상 경험으로
성장 과정에서 자주 무시 당했다면 상대가 무심코 자신을 무시하거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내면에서 강한 두려움이 일어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어렸을 때 많이 혼이 나면 스스로 부족하고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며
미움을 많이 받으면 상대의 표정과 언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또한 상대가 시큰둥하거나 냉담하고 싫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본 적은 없지만 검사를 해보면 나의 자존감은 밑바닥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이런 나의 성향을 알고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눈치를 과하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개 버릇 남 못준다고 남 눈치 안보는게 나한테는 정말 너무 어려운 일이다.
메뉴를 고를 때도 나는 상대방이 고르도록 유도를 하는 편인데 이제는 내가 먹고 싶은 것도
고르고 에전에는 내가 말실수를 해서 상대방이 기분 나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사람이 긴장하게 되어서 같이 있는 사람이 더 불편하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사람은 자고로 솔직해야 된다며 내가 좋아하거나 편한 사람에게는
중간 단계 없이 내 속 이야기를 막 하면서 급하게 다가가려고 속된 말로 들이댔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고 정도의 선을 지키면서 할 말만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로 들어주려고 한다.
더는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사람에 따라 내가 쓰는 가면이 다 달라서
집에 오면 내가 다중이가 된 거 같아 도대체 넌 누구냐며 나의 자아를 찾고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10명을 만나면 10명을 다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고
지금은 10명 중에 맘 맞는 2~3명에게 에너지를 쏟으며 집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는 말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충고나 말은 진짜 몇 날 며칠 날 위해서 고민해서 한 이야기가
아닌 고민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내뱉는 말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내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경험치 안에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직접 그 일을 경험해보지 않고 하는 충고 따위는 신경 쓸 거 없다.
나는 다른 사람말에 신경쓰지 않고 나 스스로 새로운 경험을 쌓으면서 앞으로 가면 된다.
이제는 텅 빈 외로움을 찾기 위해 끌려다니듯이 하는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나의 내면을 채우는 시간으로 점점 바꾸어 가고 있다.
그리고 감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풀 한 포기, 나무, 꽃 한 송이, 내 뺨을 스치는 바람,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자연을 즐기며 조그마한것에도 감동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하고 있다.
나를 싫어하고 나와 결이 안 맞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것을 해도
그냥 나를 싫어한다. 나와 맞지 않은 사람에게 내 금값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가식적인 나를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한다.
이 모습이 싫으면 떠나갈 것이고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남아있을테다
그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