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관하여>, 정보라
고통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억눌러야 하는 질병으로, 누군가는 삶에 필수적인 촉진제로 바라본다. <고통에 관하여>에서는 두 세력 모두 양극단으로 치닫기에 전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부작용이 전무한 진통제의 등장은 혁신이었다. 고통은 없애면 되는, 참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늘 반대 세력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른바 ‘교단’은 제약회사에 반하여 고통이야 말로 직면해야만 하는 가치로 추구한다. 이 속에서 한과 태는 어머니 홍과 함께 교단에 예속되어 버린다. 교단의 지시로 인한 제약회사 폭파 사건과 그 주동자로 잡힌 태, 이에 휘말려 부모를 잃은 경, 경의 옛 반려인 동시에 제약회사의 주인이 된 현과 형사들은 교단의 또 다른 음모를 막기 위해 다시 모이게 된다.
작가는 이야기에서 ‘인간’의 삶을 주목했다. 성은 인간의 본능과는 땔 수 없는 주제이므로 자주 등장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동성혼, 트랜스젠더처럼 어쩌면 종족 번식이라는 생명체의 목적과는 다른 성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랑의 형태는 사회적 고통을 수반한다. 평생 동안 부모의 학대로 고통받아온 경이 현과 아이를 가진 선택으로 또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인간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오해로 얼룩진 교리를 믿고 있을 때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그들을 관망한 존재는 ‘외계인’이다. 외계인은 변질된 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 외계인은 선한 듯 보이지만 그저 관찰자의 여유에 불과하다. 외계인은 언제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선과 악이 뒤섞인 복잡한 종으로 거듭남에도 그는 망설임 없이 선을 고를 수 있었다.
결말은 단면만 보면 꽤나 힘이 빠진다. 교주이자 모든 일의 원흉은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다는, 앞선 등장인물들의 수많은 갈등에 비해서는 허무한 끝맺음이었다. 하지만 아예 인간이 아닌 존재를 관찰자로 둠으로써 고통에 유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더욱 돋보였다. 결국 진정한 결말은 ‘외계인’이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트랜스젠더 형사가 반려와 연락하는 모습이라고 혼자 여겨본다. 그러니까 작가가 전하는 말은 고통에 취약하고 연약한 인간임에도 우리는 때로는 연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고통을 감수하면서 자연이 정해준 생존이라는 운명을 벗어나는 삶을 살아내기도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
고통을 참지 못하겠으면 어쩌겠어, NSTRA-14가 없는 이 세상에서는 고통스럽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