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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받지 못한 게

'니들이 게 이름을 알아?'

by 뽀득여사
딸아, 베르나르 베르베르 놀이 하는 거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어릴 적 개미를 관찰하면서 그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소산인 그 유명한 <개미>가 시작되었다지.

꼬마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개미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폭 빠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떤 모습일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는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집 딸이 이틀째 딱 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와 우리 딸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개미'였고, 딸은 '게'라는 것.

그는 꼬마였고, 딸은 어른이라는 것.



“엄마 이것 좀 봐. 대단하지?”


서해바다에 놀러간다던 딸은 뭔가 커다란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딸의 들뜬 목소리와 표정을 보아하니, 저 상자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들어있음을 짐작할수있었다.


“앗, 이게 뭐야?”


‘짜잔~’하며 열린 상자. 안경을 미처 안썼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무스름한 진흙과 큰 돌멩이들이었다. 놀라서 다시 나의 제2의 눈(이라고 칭하는 안경)을 장착하고 들여다보니 뭔가 막 움직이고 있었다. 하물며 매우 많은 것들이! 제법 커다란 게 여러마리, 소라게들, 고동들이 진흙더미와 돌덩이 사이에서 ‘나 여기 있지롱’하고 놀리듯이 제법 생기 있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딸은 오는 길에 다이소에서 사왔다며 산소통, 마른새우, 긴 집게등이 한가득인 봉지를 흔들며 헤벌쭉 웃는다.

‘우리 딸 지금 몇 살?’ 하고 싶었으나, 딸의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나도 웃어버렸다. 한동안 유학준비하느라 애쓴 딸이 아이처럼 즐거워 하는 것에 또 넘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딸은 이틀째,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또는 파브르처럼 진흙통 상자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줘야 겠어!”


산책을 하다가 딸이 말했다.

“이름을 짓지 않는 게 어때?” 남편이 말했다. 나와 딸은 남편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상자에서 오래 살지는 못할 텐데, 이름 지어 줬다가 한 마리씩 죽으면 마음이 슬플 테니까.”


나와 딸은 순간 동시에 ‘아!’라는 짦은 탄성을 질렀다. 몇 초간의 침묵.

싱그러운 초록바람이 우리 삼총사의 머리칼과 옷소매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이름을 부여 받는 다는 것.

그렇구나. 이름을 받는 다는 것, 이름이 불리워진다는 것,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닌것이지.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수정아~’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후 며칠부터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로 ‘수정아~’를 들어왔다.

어릴때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내게 ‘수정아~’하고 불렀다. 어른이 되어서는 수정이라는 이름 외에 사회적으로 지니게 되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졌겠지만, 여전히 이름의 의미는 크다.


이름이 불리우고, 이름을 부른다는 것.


나의 존재가 더욱 선명해진다는 것.

나의 자리가 더욱 굳건해진다는 것.

내가 너에게, 너가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


초록바람은 싱그럽고, 여기저기 이름을 미처 알지 못하는 작은 들꽃들이 길가에 나부낀다.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되어 있는 삼총사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나와 남편은 그사이에 여러 번 우리딸의 이름을 불러준다. 예쁜 딸이 빙긋 웃으며 우리를 쳐다본다.




“그런데, 이름까지는 아니고 일단 이렇게 부르고는 있어.”

“벌써? 어떻게 부르는데?”

“탈출하려는 게, 숨는 게, 많이 먹는 게.”


집으로 들어오자 마자 딸은 쏜살같이 상자로 달려간다.

그래, 이름까지는 붙여주지 않을 지라도 일단 마음 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지.


‘게들아, 가능하면 오래 오래 살아주렴.’

가만, 이름을 붙여주면 좀 더 오래 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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