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동에 유쾌한 철학자가 살고 있다.
담장 너머로 피어난 나팔꽃처럼, 저기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방긋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 골목으로 들어서면 2층 난간 너머로 둥글고 따뜻한 얼굴이 멀리서 보인다. 엄마는 언제부터 얼굴을 내밀고 서 계셨을까. 멀리서 보이는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니, 벌써 엄마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이구, 우리 딸 주차도 잘하네!”
앞차와 뒤차 사이를 겨우 비집고 주차한 나를 향해 엄마는 골목이 울리도록 칭찬하신다.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해봐도 소용없다. 지나가던 사람이 쳐다본다. “차는 안 막혔나 보네”, “뭘 또 그렇게 들고 왔어”, “우리 딸들 같은 효녀가 없다니까.” 오늘은 유난히 엄마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번갈아 안아주신다. 커다란 나팔꽃처럼 활짝 웃으며. 그 품에 안긴 우리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신발을 벗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깔깔 웃는다.
“엄마, 놀이터에 영광댁 할머니랑, 총알 아주머니 계시던데?”
놀이터라는 말에 엄마의 눈이 반짝, 입은 벙긋, 엄마의 얼굴이 금방 해사해진다. 놀이터 친구들 만날 생각에 들뜬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 엄마 얼굴에 가득하다.
일주일마다 엄마의 놀이터 에피소드는 화수분처럼 늘 한가득 쌓인다.
주요 등장인물은 익히 알고 있다. 간혹 신입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엄마의 놀이터의 고정출연자는 열명 정도. 간혹 등장하는 보조출연자 또는 특별 카메오까지 하면 그 인원이 상당하다.
여왕벌(엄마의 별명), 염소할매, 영광댁, 한사장, 린나이, 공주, 총알…. 한 단어로 불리는 주연들도 있지만 ‘백 살 엄마의 딸’, ‘커피 타주는 동생’, ‘귀 안 들리는 92세 언니’…… 식으로 부연설명이 늘 붙는 등장인물도 여럿이다.
“어제는 내가 내는 날이었거든, 총알 동생한테 피자 두 판 사 오라고 했어. 마침, ○○동생도 오랜만에 와서 잔치였지!”
총알 아주머니는 놀이터 멤버 중 가장 젊은 분이시다. 몸이 편치 않은 언니 오빠들을 대신해서 행동대장을 자처하신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총알’.
엄마는 다섯 해 전, 코로나 백신을 맞은 다음날 사우나를 다녀오셨다가 집에서 넘어지셨다. 그 후 한쪽 다리에 힘이 빠졌고, 꽤 오랜 시간 걷는 것이 힘드셨다. 하지만 초긍정 여왕벌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북이처럼 한발 한발,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셔서 한걸음 떼기도 어려우셨다.
의자를 잡고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시기까지,
뒤뚱뒤뚱 펭귄처럼 살살 걸어서 화장실까지,
난간을 꼭 부여잡고 뒷걸음질로 2층 계단을 내려가기까지,
비록 지팡이를 짚으시지만 집에서 100여 미터남짓 거리의 놀이터를 가시기까지,
“오전에는 몸운동, 오후에는 입운동이야!”
엄마는 놀이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신다.
오전에는 놀이터의 운동기구들을 몇 가지 하신 후, 200보 정도 되는 놀이터 트랙을 스무 번 도신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놀이터에 모인 놀이터학교 친구분들과 수다삼매경을 즐기시는 것이다. 딱 팔십 중반이신 엄마가 나이 서열상 중간이라고 하시니 초등학교로 치자면 3학년쯤.
오늘따라 엄마의 목소리가 더욱 힘이 넘친다. 표정은 얼마나 밝으신지, 워낙 재미있게 말씀하시는 재주가 있는 데다가 놀이터의 에피소드들은 정말 재미있다. 언젠가 이 에피소드들로 소설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너무도 신명 나게 이야기하시는 동안 박수도 치고, 맞장구를 치느라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이고 배야!’를 외치며 깔깔대고 웃는다. 때로는 하도 웃어서 광대가 뻐근하게 아파올 때도 있다.
“눈만 떴다 하면, 즐거운 거야!”
엄마는 이 즐거운 놀이터 일상을 이야기하시며 ‘눈만 떴다 하면 즐거운 거야!’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내 귀에, 내 마음에 콕 들어와 박힌다.
‘눈만 떴다 하면 즐거운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며칠 동안 내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엄마의 말씀.
‘눈만 떴다 하면 즐거운 거야!’
이렇게 유쾌한 철학자가 또 어디 있겠는가!
거동이 편치 않는 팔십 중반의 엄마는 집에서 백여 미터도 안 되는 놀이터, 그 작은 공간 그리고 그 안의 어울림에서 삶의 빛나는 조각을 찾아낸다.
철학의 뿌리 질문.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행복인가?
방학동에는 유쾌한 철학자가 살고 있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방학동의 유쾌한 철학자는 외치겠지.
“눈만 떴다 하면 즐거운 거야!”
https://youtu.be/_y7UwwgZzOA?si=tgdF-tcy5c38wvJ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