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머리(?)가 가벼워졌다.
귀찮아하는 일 중 하나. 미용실 가는 것.
365일 중 하루도 화장을 하지 않는 날이 없기에 나 조차도 의외인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 년에 두 번, 많으면 세 번 간다. 뿌리염색과 몇 달간 자란 머리길이를 다시 좀 줄이기 위해서다. 앞머리는 집에서 스스로 셀프컷을 한다. 그래서 어떨 때는 사선으로, 어떨 때는 그로테스크한 앞머리가 되기도 하지만, 나름 노하우가 쌓였다. 십 년 넘게 파마는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행히, 머리에 특별한 공을 들이지 않는 것에 비해 머릿결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년 늦가을에 갔었기 때문에 루틴대로라면 3월에는 적어도 갔어야 했다. 새치가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만나는 친정엄마가 지난주에는 내 머리를 보시더니 '우리 딸이 어느새 이렇게 새치가 많아졌냐!'며 안타까운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신다. 다른 사람도 아닌, 팔십 대 중반이 다되신 엄마가 딸의 노화에 깜짝 놀라시는 모습을 보니,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서방이 너 흰머리 보고 뭐라고 해?
그동안 애쓰며 살아오느라 안쓰럽다고 안 그래?"
어쩌면 엄마는 나에게 그 순간, '힘들었지, 안쓰럽다'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늘 천년만년 젊고 예쁜 딸일 것만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을까 싶으셨을까? 엄마의 하얀 머리와 겹겹의 깊은 주름보다도 오십넘은 딸의 흰머리가 엄마에게는 더 당혹스러우셨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른 미용실 예약을 해야겠다 싶었다.
다음 주에는 다시 예쁘고 아직 젊은(?) 셋째 딸의 모습으로 엄마에게 달려가야지!
"가볍게 쳐 주세요! 그새 머리가 좀 무겁게 느껴지더라고요!"
싸악 싹! 가윗날에 비스듬히 모아진 머리칼이 잘려 나가며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마치 우리 집 마당의 공작단풍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양새 같다. 눈을 감고 가윗소리와 머리칼이 잘리는 소리에 가만히 집중을 해본다.
싸악 싹. 싸악 싹. 싸악 싹.
조금씩 가벼워 짐을 느낀다.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이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후회가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잡지 못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이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에 대한 답답함이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원치 않는 삶의 숙제에 대한 부담감이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허탈함이 후드득 조금 떨어진다.
후드득. 후드득.
무겁게 느껴지는 것들이 조금 떨어진다.
슈우웅~~ 강력한 드라이기 바람이 미용가운에 꽤 쌓여있는 잘려나간 머리카락 뭉치들을 시원하게도 날려버린다.
기분이 다 상쾌하다.
자꾸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본다.
머리칼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서 가볍게 털어본다.
잠자리 날개를 비비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가벼운 머리칼이 턱끝을 장난스럽게 간지럽히고는 도망간다.
한발 한발 땅을 디딜 때마다 작은 스프링이 신발 뒤축에서 튕겨주는 듯하다.
기분이 자꾸 좋아진다.
나는 또 한 계절 또는 두 계절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머리가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 또 이렇게 말해야겠지.
"가볍게 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