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바람의 두 얼굴

땀을 날려주고 크루즈도 날려줬다

by 김연큰

두 사람은 성벽 투어 외에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고 딱히 뭘 하겠다는 것도 없었다. 아, 하나 있긴 했다. 첫날 저녁에 선셋 크루즈를 예약한 것.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 투어를 하는 게 맘에 들었던 둘은 바다에서도 배를 타보자는데 생각을 같이 했고 그래서 크로아티아 도착 이후 두브로브니크의 첫날 저녁 일정으로 예약을 해두었다. 그 외 나머지 일정은 없었다.


ChatGPT 및 Gemini에게 추천 코스를 물어보니 둘 다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첫날은 오전에 성벽 투어를 하고 오후에 올드타운을 돌아본 후 저녁에 부자(Buža) 카페에서 저녁을 먹으며 석양을 보는 걸 추천한다고 했고, 둘째 날은 스르지 산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을 보는 것을 필수로 하되 로크룸 섬 투어 혹은 해변에서 휴식 중 택하는 일정을 권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첫날에 성벽 투어 후 올드타운을 돌아보고 저녁에 선셋 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둘째 날 일정은 원래 텅 빈 도화지였기에 AI가 추천해 준 대로 따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성벽 투어를 할 예정이기 때문에 두브로브니크 시티 패스 1일권을 구매했다. 이 패스를 사용하면 성벽 투어를 할 수 있고 대중교통도 24시간 동안 무제한 이용 가능하다. 사실 둘은 2일 전 일정을 보낼 수 있어서 2일권이 있다면 아마 그걸 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1일권 다음은 3일권이었다. 이에 1일권을 사고 다음날 이동할 일이 생기면 그때 생각하기로 했다.




좌측은 성벽 투어 초반에 지나가는 보카르 요새, 우측은 로브리예낙 요새라고 한다.

대중교통을 타고 올드타운 앞에 내리니 짙푸른 바다가 먼저 눈에 띄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바다를 향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달렸다. 청명한 하늘 아래 그보다 더 또렷하게 푸르른 바다, 그리고 가까운 곳은 초록빛도 살짝 머금은 투명한 바다. 이 모든 조합이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 강원도나 제주도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바닷물이 닿는 마지막까지 어김없이 맑고 쓰레기가 전혀 없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플리트비체에서도 그랬지만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벽에는 그늘이 거의 없다.

잠시 바다를 감상한 후 두 사람은 바로 성벽으로 향했다. 성벽 투어는 이른 아침에 하는 걸 권장한다고 하여 두 사람도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숙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가보니 왜 일찍 가라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첫째, 시간이 지날수록 방문객 수가 급증한다. 특히 오전 11시 이후에는 단체 관광객이 많아진다. 둘째, 성벽 투어는 말 그대로 올드타운을 두르고 있는 성벽을 돌아다니는 것이기에 그늘이 거의 없다. 여름에 방문한다면 조금이라도 시원할 때 가는 것이 쾌적하다.

(좌) 로브리예낙 요새를 바라본 모습 (우) 올드타운

사실 땡볕인 것 외에는 그냥 성벽을 따라 걸으면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생각보다 계단이 많아 힘든 부분이 있었다. 물론 가끔 쉬면서 올드타운이나 바다를 구경하면 되긴 하다만. 그런데 상상하던 것보다 건물들이 쨍한 주홍빛은 아니었다. 우측 사진처럼 빛이 바래 주황색과 벽돌색의 중간 정도 되는 지붕을 더 많이 본 듯하다. 사실 상상하던 그런 지붕은 성벽 투어가 아니어도 두브로브니크 곳곳에서 볼 수 있긴 하다.

두브로브니크 바다에 반해버렸다

막상 성벽 투어를 하면서 느낀 것은 기대했던 그 주홍빛 풍경보다는 바다가 상상 그 이상 예쁘다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본 바다 중 가장 예뻤다. 지금까지는 유럽 바다는 지중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엣헴 어딜 감히 아드리아 해에 비비느냐!' 이렇게 변해버렸달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까운 곳은 맑고 초록빛을 띤 투명한 바다인데 먼 곳은 감색(紺色) 혹은 반물색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어둡고 진한 푸른색인 점, 그리고 맑은 날씨 덕에 그 위로 햇빛이 내려앉아 끊임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윤슬이 아름다웠다.

파도마저 아름답다.

이 날은 바람이 강했고 그래서 성벽 투어를 하다가 바다를 보면서 쉬면 꽤 시원했다. 파도와 배를 감상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바람이 너무 강해서 카누는 못 탈 거 같단 말을 했다. 그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카누를 타는 사람이 있긴 한데 파도 때문에 꽤 힘겨워보였으며 초보자는 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면 파도를 타고 통통 튀는 제트보트 같은 배의 경우는 파도 덕분에 무척 재밌어 보였다.

뷰 맛집이라는 부자 카페. 이때는 자리 많았다.

익히 AI들이 추천했던 부자(Buža) 카페 근방을 지날 때도 바다 구경을 잠시 했다. 이 카페 근처에는 다이빙 포인트가 있다는데 다이빙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어 어딘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바람과 파도를 이기고 다이빙하는 용감한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새삼 할슈타트에서 어린아이들이 다이빙하는 걸 바라만 보던 겁 많은 성인 J, P는 현타가 오기도 했다.


성벽 투어에 그늘이 없다는 걸 알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오고 물도 준비했지만 2/3쯤 오니 둘 다 배고파서 수척해졌다. 성벽 투어 코스 중간에 음료와 간식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있었지만 왠지 당기지 않아 가지 않았는데 약간 후회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민체타 요새

그 와중 거대한 오르막 계단이 나타났다. 알고 보니 민체타 요새(Tvrđava Minčeta)로 가는 길이었다. 여기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자는 느낌으로 으쌰으쌰 올라갔다. 여기 올라가면 탁 트인 도시와 바다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는데 어디 얼마나 멋진가 두고 보자 하면서 말이지.

왼편에 보이는 섬이 로크룸 섬이다.

오... 올라가니 정말 풍경이 멋졌다. 두브로브니크 하면 흔히 떠올리는 주홍색 지붕 풍경이 이거구나 싶었다. 쪽빛에 가까운 바다색과 보색으로 대비되어 더욱 예쁘게 보였다. 게다가 가장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조금 전까지 줄줄 흐르던 땀이 다 식어버렸다.

요새 구멍 사이로 풍경을 보면서 사진 찍기

민체타 요새는 말 그대로 '요새'로 사용된 곳이라 포를 쏘는 구멍이 꽤 많이 있다. 높은 곳에 있어서 다른 요새보다 더욱 많은 느낌인데, 그 구멍 사이로 풍경을 보는 것도 꽤 재밌다. 사진을 찍으면 위와 같이 액자처럼 연출된다.


사실 이런 액자 같은 연출은 체스키크룸로프에서도 이미 P가 했던 것인데, P는 이 아이디어를 경복궁 경회루에서 얻었다고 한다. 예전에 경회루 특별관람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문화해설사분이 경회루 내부에서 밖을 볼 때 액자처럼 보인다고 했고 거기서 감화하여 이런 뷰를 발견하면 꼭 액자 구도로 찍는 습관이 생긴 것.

민체타 요새에서 찍어본 전경. 바람 소리가 매우 거세다.

민체타 요새는 성벽 투어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같은 곳이었다. 이후는 내리막길이었고 입장했던 곳으로 나왔다. 한 시간 반 정도 돈 것 같은데, 나올 때는 입장하는 사람이 매우 많아 입구가 빽빽해질 정도였다.




이제 진짜 밥을 먹어야겠다 싶어 버스 정류장 근처의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J에게 전화가 왔다. 발신 번호를 보니 두브로브니크 현지에서 온 전화 같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뭔가 길게 설명을 했고 J는 P에게 비보를 전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크루즈 업체 직원인데, 그의 말인즉슨 이날 저녁 탑승하려 했던 크루즈가 강풍 때문에 운행이 어려워졌다며 취소하거나 다른 날짜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J는 갑자기 닥친 소식에 결정 장애가 왔고 P가 전화를 대신 받아 내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강풍 예보가 있어 취소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맛난 걸 앞에 두고 들은 슬픈 소식...

결국 둘은 크루즈를 취소하기로 했다. 조금 전 민체타 요새에서 땀을 식혀준 바람이 참 고마웠는데, 이럴 땐 왜 이리 원망스럽고 얄미운지. 성벽 투어 중 '바람이 세서 카누는 못 탈 거 같다'라고 말했던 분이 문득 떠올랐다. 그분은 이미 이 정도 바람이면 배 타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계획이 어그러진 J는 매우 실망했지만 그래도 J의 먹성은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맛있는 문어 스테이크를 먹으며 기분이 나아진 것. '우리는 희한하게 바다에서 타는 배랑은 연이 없네.'라는 말을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예전에도 바다에서 타는 배를 예약하면 자꾸 취소되곤 했다. 유이하게 탔던 게 울릉도를 오간 선박 및 독도를 오간 선박이었다.


P는 이리된 김에 오늘은 두브로브니크 패스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했다. J도 동의했다. 대중교통으로 가야 하는 곳은 이 날 몰아서 다 가고, 다음 날은 숙소 근처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곳에서 놀기로 했다.


AI들이 알려준 두브로브니크 팁 중 하나는 12시에서 3시 사이는 카페나 숙소 등에서 쉬는 것을 추천한다는 것. 햇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선은 숙소로 돌아가 빨래를 하고 조금 쉬다가 4시쯤 다시 여기로 돌아와 올드시티를 구경하기로 했다.

세탁기가 있는 덕에 땀에 절은 옷을 빨았다

둘이 묵는 숙소는 아파트였고 다행히 세탁기가 있었다. 땀에 절은 옷을 다 빨고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쉬었다. 집안 곳곳에 빨래 널 곳이 많아 몇 차례 돌렸다.


오후 4시가 넘어 다시 올드시티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성벽도 올드시티도 오전보다 한산한 느낌이었다. 만약 성벽 투어를 할 건데 그날 아침 늦잠을 잤다면 이 시간쯤 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올드시티 거리 풍경

올드시티 바닥은 무척이나 반질반질하다. 특히 비 오는 날엔 잘못하면 미끄러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거리 좌우에 패인 곳이 있는데 아마 과거에 마차가 다닌 길이었을 듯하다.

겜덕특: 다 인게임 아이템으로 보임

아주 오래된 약국이 있다는 프란체스코 수도원 구경도 했는데 둘의 눈에는 약국보다는 저런 아이템들에 눈이 갔다. 특히 P는 최근 하는 게임에서 성직자 종류의 직업을 키우고 있는데 이걸 보니 다 내 캐의 아이템으로 보인다며 깔깔댔다. J는 겉으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내심 이런 시각이 신선하다는 생각도 했다.

극명한 명암대비

해가 강해서인지 오후 들어 빛과 그림자 대비가 강렬했다. 이런 대비를 이용해서 둘은 그림자 사진을 찍기도 했다. 위와 같이 올드타운 자체의 그림자를 찍은 것도 있지만 둘이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했다. 참 유치하지만 잘 노는 두 사람이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두브로브니크 비둘기들

두 사람은 올드타운의 시선강탈자로 비둘기를 꼽기도 했다. 스플리트 때부터 여기 비둘기들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단다. 비둘기들은 당연히 의도한 게 아니겠지만 저렇게 조각상 머리 위에 올라가 있거나 피에타 조각 아래에서 두리번대는 모습들이 인간 입장에서 볼 때 재밌었던 것.

문어버거가 참 맛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일찍 배고파졌다. 원래 저녁 메뉴로 올드타운의 문어버거를 생각했었는데 그냥 좀 일찍 가서 먹기로 했다. 매장은 작았는데 의외로 화장실이 있어 손님들이 계속 화장실을 이용했다. J와 P도 화장실을 가려고 했는데 하도 사람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눈치싸움을 하게 됐다.


또한 이곳은 내부 인테리어에 손님들 기여분이 꽤 되었다. 나무 포크에 알록달록 색칠을 하거나 문구를 쓰는 등 포꾸(포크 꾸미기)를 해서 장식할 수 있는 것. P는 포크마다 적힌 문구를 구경하며 가끔 한국어가 보이면 웃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가게 직원이 P에게 사인펜 세트를 건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P는 조금 당황했지만 포크 앞에는 한국어로, 뒤에는 영어로 문구를 적고 적당한 곳에 배치했다.


그런데 이 매장,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둘이 먹고 나오니 줄이 길게 늘어져있었다. 올드타운을 조금 더 돌아다니다 스르지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이 매장 옆을 다시 지나게 됐는데 그때도 줄이 길었다. 저녁을 일찍 먹기로 한 건 좋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 문어버거 매장: https://maps.app.goo.gl/QcDpcve11SkALn7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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