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의 세계에서 만들었던 텃밭 이야기
난 어려서부터 무언가 키우거나 성장시키는 게임을 좋아했다. 그 재미를 알게 한 게임은 <프린세스 메이커>인데, 가상의 딸을 키우면서 육성 방향에 따라 그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게 되는지 이런저런 체험을 해보며 재미있고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롤 플레잉 게임(RPG)을 하면서 나의 캐릭터를 키우는 것에 맛 들였고, 더 다양한 장르를 접하다 보니 나의 마을이나 나라를 내 개성껏 만들어내는 게임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체험한 게임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다한 게임은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하 '모동숲')이다. 이 게임은 '너굴'이라는 악질 너구리에게 빚을 지면서 시작한다. 마치 내게 땅을 주고 맘대로 해보라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채무고 일을 해서 돈 벌면서 갚아야 한다. '현실에서도 일하면서 빚을 갚는데 게임에서도 이 짓을 한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실과 달리 이 게임은 생각보다 빚을 금방 갚고 여유를 찾게 해 준다. 사람이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모동숲을 하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자신의 마을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특성이 보이는 듯하여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이 게임에서 빚을 갚기 위해, 그러니까 돈 벌려고 시작하는 일 중 하나는 텃밭을 가꾸는 일이다. 감자, 당근, 밀, 사탕수수, 토마토, 그리고 호박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뭔가 심고 나면 4일 뒤 다 자라고, 그 후에는 2일마다 무한으로! 수확할 수 있다. 물론 물은 줘야 하지만 게임 속에서 혹시라도 비가 오면 물을 안 줘도 된다. 현실에서는 이런 걸 키우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죽이고 말 것 같은데, 게임에서는 규칙만 잘 지키면 쑥쑥 잘 자라서 내 손에 돈도 쥐여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진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빚을 갚은 후다. 작물마다 색이 다르다 보니 시각적으로 어떻게 예쁘게 보일까를 고민하며 텃밭 구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 텃밭을 가꿀 때부터 이렇게 하기도 하던데, 나는 그렇게 계획적이지 않아서 일단 돈을 벌고 나중에 갈아엎어 꾸미곤 했다. 근데 꾸밀 때도 혼자 난리다. '연갈색 빛의 감자 옆에 주황빛 호박을 놓는 게 좋겠지? 그리고 그 옆은 빠알간 토마토가 적격일 거야! 아니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호박이 익기 전에는 누르스름하니까 감자 옆은 좀 그런데... 밀도 익으면 노랑 노랑 해지니 감자랑 붙으면 너무 비슷한 색만 모이니 좀 떨어뜨려놔야 하지 않을까? 당근도 주황색이니까 호박과 붙어있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이런 식이다. 하지만 고민이 깊어봐야 만족스러운 결과는 없었던 거 같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고 그냥 비슷한 건 비슷한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때가 더 예쁘게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열매의 색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푸릇푸릇 한 잎도 있는 데다 그 잎 모양도 다 다르니 색 배치에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공들였던 그 텃밭은 지금은 없다. 어느 순간 게임에 시들해지며 손을 놓게 되고,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게임에서 다른 텃밭을 키우다 보면 언제 그런 노력을 들였나 싶다. 텃밭을 키우는 요소가 있는 게임 중 가장 최근에 했던 건 재작년이었나? <데이브 더 다이버>라는 게임인데 이 게임은 오히려 모동숲만큼의 기억도 없다. 게임 내에서 스프링클러를 설치할 수 있고 밭을 돌볼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어 크게 공들일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쉽게 키우면 그만큼 쉽게 잊히는 건 아닐까 싶다.
이 글은 <잔기술>이라는 에세이 쓰기 소모임에 제출한 글입니다. 지정 주제 세 가지 중 하나로 글을 쓰는 주간이었으며 제가 선택한 주제는 '텃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