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데 싫은, 싫은데 좋은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작품 30 연주를 듣고 있다 보니 피아노를 주제로 글을 써봐야겠다 싶다. 뭔가 배경 음악이 필요할 때 피아노 연주를 듣는 습성이 있는데 사실 누가 연주를 잘한다고 판단하거나 감동을 느끼거나 이런 건 잘 모르고 그냥 피아노 음색이 좋아서 듣는다.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어린 꼬꼬마 시절, 아버지는 내가 절대음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언가 멜로디를 들으면 그 음을 기가 막히게 맞히더란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피아노를 공부하면 뭔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 때부터 이미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분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아버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손 크기에 비해 손가락이 짧아서 악보에서 한 옥타브를 동시에 치는 경우가 나오면 매우 고통스러웠고, 하루에 수 십 번 같은 곡을 쳐야 한다는 게 너무 지겨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곡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지도, 우러나지도 않았다. 연주를 한 게 아니라 그저 기계적으로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나를 포함한 몇 명에게 연주회를 나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같이 나간 이들 중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했고, 이는 내가 피아노를 그만둘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피아노를 치는 게 지겹고, 재밌지 않고, 즐겁지 않고, 그저 고통이라고 했다. 싫은 것은 굳이 시키지 않는다는 주의인 어머니는 그만두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피아노를 치느니 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아버지도 두 손을 들었다. 그 뒤로 한동안 피아노는 물론이고 악기 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고 음악을 듣다 보니 피아노 음색이 참 아름답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렸을 때 일처럼 피아노를 치기만 하던 시절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하지만 여전히 직접 치는 건 싫었다. 어렸을 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날 것 같았고 그렇게 된다면 피아노 음색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피아노 연주를 찾아 듣게 되었다. 장르를 가리지도 않는다. 클래식이든, 가요든, 동요든, 게임 음악이든 뭐든 피아노로 연주한 것이면 기꺼이 들었다. 재밌게도, 클래식이 아닌 장르 중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곡은 토이(Toy)의 <피아노>인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을 때 듣기 참 좋은 곡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듣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연주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피아노는 대상에서 제외였다. 피아노 치는 게 싫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내 손가락 길이가 짧은 탓도 있었기에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걸 하고 싶었다. 몇 가지 타악기를 시도해 보다 결국 안착한 것은 의외로 현악기인 우쿨렐레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 우쿨렐레 동호회가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가입했다가 빠져버렸다. 리듬을 탈 수도 있고 멜로디를 연주할 수도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줄이 4개밖에 되지 않아 쉽게 연주할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배울 때 날 힘들게 했던 방해 요소가 없으니 금방 재미를 붙여 같은 곡을 수 십 번 연습해도 질리지 않았다. 연습을 많이 하니 자연히 실력도 빠르게 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동호회 내에서 가장 연주 잘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단체로 연주회도 몇 번 나갔는데 내가 센터에 있곤 했다.
이 무렵 아버지가 내 재능을 제대로 눈치챈 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절대음감이 있는 건 사실이라 좋아하는 노래의 멜로디를 금방 딸 수 있었고,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우쿨렐레로 연주할 수 있는 악보를 만들었다. 아버지의 실수라면 내가 피아노에 재미를 붙일 틈도 없이 시킨 것이고, 재미를 느낄 기회도 없을 악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를 배운 덕에 내 음악 근육을 훈련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결국 좋아하는 악기를 찾을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생각한다. 고로 피아노는 나에게 좋은데 싫은, 싫은데 좋은 그런 존재다.
이 글은 <잔기술>이라는 에세이 쓰기 소모임에 제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