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이 경찰서 복도에 서 있을 때,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분주했다.
‘유진의 사건에 진전이 생긴 걸까?’
그는 수사에서 배제된 이후, 정보를 얻을 방법이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유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선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그때, 복도를 지나던 후배 정 형사가 눈에 들어왔다. 하진과는 과거부터 친분이 있는 후배였다. 하진은 정 형사를 붙잡을 생각으로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진은 정 형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며 정보를 끌어낼 방법을 생각했다. 직접적인 질문 대신, 가벼운 대화처럼 보이게 해야 했다.
“오랜만이네, 정 형사.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더라?”
정 형사는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뭐 사건이 많아서 정신없습니다.”
하진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유진 씨 사건이 복잡하다고 하더니, 뭔가 진전이 있었나 보지? 이번에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고.”
정 형사는 잠시 멈칫했지만, 오랜 친분 덕에 경계심을 풀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자살로 결론 내리기엔 이상한 점이 많거든요.”
하진은 호기심을 감추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지. 유진이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은 들더라.”
정 형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유진 씨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어요. 특히 강정우라는 사람이 가장 마지막으로 그녀와 만난 인물로 의심받고 있어요.”
하진은 강정우의 이름이 언급되자 속이 뜨거워졌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강정우라... 그 사람은 요양병원에서 유진이와 꽤 가깝게 지냈었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정 형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퇴원 이후에도 둘이 만난 기록이 있어요. 유진 씨가 그를 만난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하진은 추가 정보를 더 끌어내기 위해 물었다.
“그럼 강정우 외에도 조사를 받는 인물이 있나? 혹시 유진 사건과 연결된 사람이 또 있나 해서.”
정 형사는 잠시 말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유진 씨 주변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습니다.”
하진의 심장은 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또 다른 남자라니… L이 아닌 누군가가 더 있다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더 물어보는 것은 위험해 보였다. 정 형사가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더 이상의 정보 수집이 어려워질 것이었다.
하진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이번 사건이 복잡하네. 수사팀도 고생이 많겠다.”
정 형사는 살짝 긴장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뭐든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어요.”
하진은 그를 향해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해. 나중에 밥이라도 한번 먹자.”
정 형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하진은 느긋한 척하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찰서를 떠나며 하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유진의 주변에 또 다른 남자...? 그가 누굴까? 그가 "그 사람"일까?’
유진의 마지막 일기에 적힌 분노와 경멸의 대상이 L이 아닌 이 새로운 인물일 가능성이 떠올랐다. 유진이 왜 그토록 고통받았는지를 알기 위해, 그는 그 남자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했다.
***
그날 이후로, 민아는 주위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해졌다.
‘누군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는데... 그 느낌은 사라졌다.’
전에 보았던 포스트잇조차 다시는 발견되지 않았고, 괴로웠던 그 불쾌한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치 일시적인 환각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수찬 역시 여전히 직장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료들에게 경박하게 대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그 모습에 의심할 만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민아는 그날의 두려움을 잊을 수 없었다.
‘언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방심하면 안 돼.’
그녀는 작은 발소리나 그림자에도 예민해졌고, 퇴근길에는 항상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그 시선이 다시 느껴질까 봐 두려웠다."
매일같이 평범한 하루가 반복되지만, 민아의 경계는 풀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 오히려 이 고요함이 더 불안해.’
그날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민아는 이상한 조용함 속에서 무언가 숨겨진 위협을 느꼈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맴도는 듯했다.
‘정말 다 끝난 걸까? 아니면 지금이 폭풍 전의 고요인 걸까?’
불안과 의심 속에 잠식된 그녀의 일상은 여전히 완전한 안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앞까지 온 민아. 문 앞에 다다른 순간, 아무런 생각 없이 문을 보던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거기에는 또다시 붙어 있는 포스트잇.
“그동안 내 생각 많이 했어?”
민아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그동안 포스트잇이 더 이상 붙지 않아서 안심하려 했던 그녀의 마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대체 이게 누구 짓이야...”
민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포스트잇의 메시지는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이걸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민아는 주위를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손끝이 떨렸다.
‘대체 누구지...? 이건 정말 끝나지 않는 악몽 같아.’
포스트잇을 붙인 그 사람은 단순한 협박범 이상이었다. 민아의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 그녀의 심리마저 조종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민아는 손에 쥐고 있는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전에 유진의 일로 보았던 경찰이 건네주었던 명함이었다. 그에게 연락할까 망설이던 순간, 민아의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지금 연락하는 게 맞을까? 혹시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포스트잇에 적힌 소름 끼치는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