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은 유진의 집을 샅샅이 뒤지기 위해 들어섰다. 유진이 늘 일기를 써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안에 ‘L’의 정체와 사건의 실마리가 담겨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제발 경찰이 일기를 가져가지 않았길...”
그는 속으로 조용히 기도하며 방을 둘러보았다. 책상, 서랍, 그리고 그녀가 자주 쓰던 작은 테이블까지 차례로 확인했다. 유진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녀가 마지막까지 남긴 어떤 단서라도 찾으려 애썼다.
하진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노트 몇 권을 발견했다. 대부분은 자원봉사나 꽃집 일에 대한 짧은 메모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비밀을 담아둘 만한 일기장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더 깊이 숨겨둔 걸까?’ 그는 유진의 서랍을 열어보며 더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침대 밑에서 낡은 가죽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분명 유진이 자주 사용하던 일기장이었다.
하진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몇 장을 넘길 때마다 익숙한 유진의 필체가 담긴 일상과 생각들이 적혀 있었다. 자원봉사 이야기, 꽃집에서의 에피소드, 그리고 가끔은 하진과의 추억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L’에 대한 단서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집중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던 중, 그는 한 페이지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L이라는 남자와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이 적혀 있었다.
“L과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뭔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를 안다는 확신이 들지만,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진은 이 문장을 읽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유진은 그 남자를 알고 있다고 느꼈지만,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건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진은 일기 속에서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을 곱씹었다. 유진이 ‘L’을 원래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 도대체 ‘L’이라는 남자는 누구일까? 단순한 스토커가 아니라 유진의 과거와 깊이 얽힌 인물일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어떻게 누군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까? 그녀의 기억 속에 묻혀 있는 뭔가가 있었던 걸까?’
하진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그 남자의 정체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유진의 삶과 교차되었을 가능성이 분명했다.
하진은 유진과 함께 보육원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그 시간들이 모두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유진은 외로움과 불안을 품고 있었다. 혹시 ‘L’이라는 남자는 보육원 시절부터 그녀와 얽혀 있던 인물일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인물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 유진이 남긴 이 경고가 자꾸만 떠올랐다. L은 단순한 외부인이 아니라, 그녀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하진은 꽃집 사장이 언급한 'L'이라는 인물과 보육원 원장이 말했던 과거의 인물들이 연결될 가능성을 직감했다.
혹시 원장이 ‘L’이라는 이니셜과 관련된 더 많은 단서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보육원을 찾아갔다.
보육원 원장은 ‘L’이라는 단서가 떠오르는 사람을 이미 특정했지만, 그 인물의 이름을 하진에게 말하지 않았다. 원장의 표정에는 무거운 고민과 망설임이 가득했다.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나?” 하진은 원장의 태도에서 뭔가 중요한 사실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가 알고 있는 인물은 단순한 과거의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진은 유진의 가죽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그는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유진의 삶에 깊이 스며든 L이라는 남자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했다.
다이어리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L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L은 오늘도 나를 이해한다고 말해줬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지면서도 불안하다.”
“L과의 대화는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 같아. 그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두려울 때도 있다.”
L이라는 남자는 단순한 스토커가 아니었다. 그는 유진의 삶 속에 은밀하게 녹아들어 있었고, 그녀의 감정과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진은 그런 상황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다.
하진은 유진의 다이어리 마지막 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손을 떨었다.
[L의 집에 갔다. 그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
아주 잘 살고 있는 그 미소에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분노가 들끓었다.]
이 짧은 문장들은 유진의 고통과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록이었다. 하진은 유진이 얼마나 큰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유진이 직접 그를 찾아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유진은 그를 찾았을까? 그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렇게 분노했을까?’
하진은 일기장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진이 그 남자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
‘L이란 남자에게 유진은 단순히 집착의 대상이 아니었을 거야. 그가 누군지 밝혀야 해.’
하지만 다이어리에는 그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오직 유진의 분노와 고통이 담긴 기록만 남아 있었다.
하진은 다이어리 속 마지막 기록을 다시 읽으며 결정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L이라는 남자가 사건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진의 문장을 곱씹을수록, 하진은 더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
‘L은 단순한 매개체일 뿐이었을지도 몰라. 유진의 진짜 목표는 "그 사람"이었어.’
‘유진이 말한 "그 사람"은 누구일까?’ 하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 사람이 L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그리고 유진이 왜 그 사람에게 그렇게 분노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L은 그저 그 사람과 유진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을 뿐, 유진의 진짜 고통과 분노는 "그 사람"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끝내 그 사람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하진은 점점 더 L이 단순한 조력자나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L은 진짜 목표가 아니야. 유진이 찾아낸 건 L 뒤에 숨어 있던 그 사람.’
하진은 이제 유진이 직접 마주했던 그 사람을 밝혀내야만 사건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L은 그저 거대한 퍼즐의 조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진은 유진의 일기 속 기록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진이 이렇게까지 경멸하고 분노한 상대가 있었다니...’
유진은 언제나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깊은 감정의 경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하진은 유진의 일상적인 모습과 이 일기 속 기록들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유진이 이런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니...”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돕고 미소를 지었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보다도 깊은 분노와 경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그녀의 삶을 잠식했다.
하진은 유진이 혼자 감당해야 했던 감정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빠졌다.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이런 고통을 혼자 감당하지 않았을 텐데.’
유진은 언제나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하진조차도 유진이 그토록 경멸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하진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의문만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길래, 유진이 이렇게까지 경멸하고 분노했을까?’
이 사람은 분명 유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 상처는 단순한 오해나 불만 이상의 것이었다.
‘그 사람’이 유진의 죽음과 직접 연결된 인물일 가능성이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