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는 뛰듯이 병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수찬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골목은 조용했고, 사람들의 인기척조차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려던 그 순간, 민아는 문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메모를 발견했다.
"곧 다시 만날 거야."
메모 속 짧은 문장이 민아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이 메모는 예전에 유진이 말했던 스토커의 쪽지와 똑같았다.
"설마..."
민아는 입술을 꽉 깨물며 뒤를 돌아 주변을 살폈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마치 누군가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민아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은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직감을 피할 수 없었다.
‘유진 언니가 이걸 느꼈던 걸까?’ 그녀는 유진이 혼자 얼마나 두려웠을지 깨닫고 가슴이 아팠다.
하진은 공식 수사에서 배제된 후, 혼자서라도 유진의 죽음과 얽힌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하나씩 단서를 모아가던 중, 유진이 최근에 두 사람의 과거가 깃든 보육원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보육원 입구에 도착한 하진은 낡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이곳은 유진과 자신이 함께 지내며 유일한 가족처럼 의지했던 공간이었다. 유진이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궁금해졌다.
“하진이구나! 정말 오랜만에 오는구나.” 원장은 따뜻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네, 원장님... 유진이가 여기 다녀갔다고 들었어요. 혹시 무슨 일로 왔는지 아세요?” 하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천천히 대답했다.
“유진이 며칠 전에 왔었지.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더라. 옛날 사진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게 빠진 것 같았어.”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와 연결된 무언가를 유진이 찾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유진이가 무슨 말을 남기진 않았나요?”
원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진이 그러더라. 누군가가 갑자기 그때부터 계속 뒤를 쫓아온다고...”
“그때부터 계속 뒤를 쫓아온다고...” 원장의 말에 하진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때부터라니요? 언제부터요?”
원장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천천히 대답했다. 원장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천천히 대답했다.
“유진이가 그랬어.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네가 떠나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다고.”
하진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자신이 보육원을 떠나고 유진이 혼자 남아 있었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진은 자신이 떠난 후 유진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때부터 유진의 뒤를 쫓아온 스토커가 있었다니... 그리고 그 스토커가 유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유진이는 왜 그때 저한테 말하지 않았을까요?”
하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진은 항상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곤 했다.
하진은 유진보다 두 살 많았기에, 나이가 차서 보육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 보호 기간이 끝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유진을 보육원에 남겨두고 홀로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하진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 그는 유진과 단둘이 앉아 있었다.
“나도 곧 나갈 거니까 걱정 마. 우리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유진은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가득했다.
하진은 유진의 활동 반경이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녀가 주로 다니던 곳은 요양병원, 그녀가 일하던 꽃집, 보육원, 그리고 집뿐이었다.
‘스토커를 만난 것도 이 중 하나일 거야.’ 하진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스토커의 집착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존재는 유진의 일상 속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진은 유진이 자신에게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생각할수록 답답했다. 경찰인 자신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유진은 왜 혼자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당하려 했던 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유진이 자신을 찾기만 했다면 무엇이든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하진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유진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유진의 고통이 자신에게 알려졌다면, 하진은 결코 그녀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진은 유진이 일하던 꽃집을 찾았다. 이곳은 그녀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 중 하나였고, 유진의 일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었다. 유진의 죽음과 스토커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하진은 이곳에 남겨진 모든 흔적을 조사하기로 결심했다.
꽃집 주인은 여전히 유진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었다.
“유진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매일 이곳에서 환하게 웃으며 꽃을 만졌죠. 하지만... 가끔 뭔가 신경 쓰이는 듯 불안해할 때도 있었어요.”
“사실...” 꽃집 주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L이라는 남자와 유진이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아요. 유진이 그 남자에게만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하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가까운 사이였다고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주인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끔 유진이 꽃을 준비할 때면 굉장히 섬세하게 신경을 썼어요. 마치 연인에게 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했죠.”
하진은 주인의 말이 중요한 단서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L’이라는 남자와 유진의 관계가 단순한 배달 이상의 무언가였다는 오해. 이 남자가 유진의 삶에 깊이 얽혀 있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유진이 그 남자에 대해 뭐라고 말한 적은 없었나요?” 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절대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어요. 대신 그 남자와 만난 후에는 가끔 불안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죠. 하지만 물어보면 항상 괜찮다고만 했어요.”
하진의 머릿속에서 의문이 점점 커져갔다. 만약 이 ‘L’이라는 남자가 유진과 가까운 사이였다면, 왜 유진은 그의 존재를 하진에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하진은 유진과의 과거를 떠올리며 혼란에 빠졌다. 유진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녀는 항상 제일 먼저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만큼은 비밀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유진이 남자친구가 생겼다면 분명 나한테 말했을 텐데...”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집 주인의 말대로라면 유진은 ‘L’이라는 남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듯 보였다.
대체 이 ‘L’이라는 남자는 누굴까? 왜 유진은 이번만큼은 나에게 그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까?’ 하진의 머릿속에는 의심과 분노가 얽히기 시작했다.
유진이 자신에게 이 남자에 대해 숨겼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진은 유진의 과거 연인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는 몇몇 남자친구들이 있었지만, 그 관계들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유진은 결국, 누군가의 옆에 머무르는 것보다 모두를 돕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헌신하는 데 집중하고 싶어 했다. 그 누구와도 오랫동안 연애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일이 유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진의 마음속에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유진이 이전의 모든 연애를 자신에게 털어놓았는데, 왜 이번에는 ‘L’이라는 남자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