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찬은 요양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며 예쁜 여자들에게 유독 친근하게 굴던 인물이었다. 그는 늘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며 얼굴이 이쁜 여성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장난스럽게 넘겼지만, 민아는 항상 경계의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특히 수찬을 의심했던 이유는,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수간호사가 해준 조언 때문이었다.
"수찬과는 절대 단둘이 있지 마. 뭔가 껄끄러운 인물이야."
수간호사의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수년간 병원에서 경험으로 쌓인 경고였다. 민아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수찬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수찬은 언제나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민아를 마주하자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깨가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내가 좀 풀어줄까요?”
민아는 순간 몸이 굳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가까이 다가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경계를 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민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쳤다.
“아니요, 괜찮아요.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민아는 차갑게 대답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수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전 그저 도와주려는 거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감춰진 뭔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느껴졌다.
민아는 유진이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직 민아에게만 고백했던 그 이야기들. 그 중 하나는, 유진이 누군가의 시선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루는 유진이 병원에서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민아를 불러내어 조용히 속삭였다.
“민아야, 나... 요즘 자꾸 누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민아는 당황하며 물었다.
“누가 그런 것 같아? 혹시 병원에 있는 사람인가?”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근데... 집 앞에 붙은 포스트잇에 이상한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어.”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민아는 놀란 채 물었다.
“‘넌 나를 피할 수 없어.’” 유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게 계속 반복되니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민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경찰에 신고했어야지! 왜 혼자 참고만 있었어?”
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냥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갈 거라고...”
하지만 민아는 유진의 눈빛에서 두려움과 지침이 스며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유진이 고통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유진의 말에 따르면, 스토커의 행위는 점점 더 대담해졌다.
밤늦게 창문 너머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전화벨이 울리고 끊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유진의 집 앞에는 누군가 꽃과 쪽지를 두고 갔고, 그 내용은 점점 불쾌한 말들로 변해갔다.
“‘우린 곧 만나게 될 거야.’ 같은 메시지가 남겨질 때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커피 잔을 쥐며 말했다.
민아는 그때 왜 유진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지 못했는지 후회했다.
“언니... 혼자 힘들었구나.” 민아는 속으로 자책했다.
민아는 유진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어딘가 찜찜한 감정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유진은 언제나 밝고 긍정적이었다. 그 전날에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민아야, 오늘 날씨 정말 좋다. 우리 다음에 어디 같이 가자.”
유진은 그날도 변함없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가 다음 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민아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유진과 가까웠다고는 해도, 민아는 유진의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유진 언니도 나에게 감추는 게 있었을까?” 민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열린 사람이었지만, 때때로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있어.” 유진이 가끔 중얼거렸던 그 말들이 민아의 기억 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 그 말을 더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더 물어봤어야 했을까?” 민아는 스스로를 탓했다.
“민아씨?”
민아는 퇴근 후 요양병원 정문을 지나던 중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순간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둑해진 저녁 하늘 아래,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어딘가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수찬이었다.
“어? 선생님..?” 민아는 긴장된 채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뭐 하세요?”
수찬은 가볍게 웃으며 걸어왔다.
“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마침 보고 인사하려고.”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스며 있었다.
민아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며 말했다.
“벌써 퇴근하셨어요? 여기 병원 앞에서 뵐 줄은 몰랐네요.”
수찬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벼운 미소를 유지했다.
“괜찮아요? 요즘 힘들어 보이던데.”
다정한 말 속에 숨어 있는 불편한 친절. 민아는 가벼운 대화로도 그에게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저는 항상 이렇죠.” 민아는 단호하게 답하며 빠르게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수찬은 느긋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우리 커피라도 한 잔 할까요? 서로 이야기 나누면 좋잖아요.”
민아는 속으로 차가운 불쾌감이 일었다.
“아니요, 선생님. 오늘은 집에 좀 빨리 들어가야 해서요.”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절했다.
수찬은 멈칫하며 잠시 민아를 응시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에서 이상한 집착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꼭 봐요.” 수찬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민아는 수찬의 말에 불쾌한 기운을 느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는 서둘러 병원 앞을 지나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뒤에서 느껴지는 수찬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자신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수찬이 이렇게 퇴근시간에 맞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게 민아는 소름이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