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동이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요 2월부터 3월 초까지, 나름 괜찮은 루틴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매일 여섯시에 일어나고, 항상 하루를 점검하며 일찍 잠에 들었다. 90kg까지 불어난 체중을(골격근량도 41kg이 되긴 했지만) 줄이기 위한 식단과 운동도 잘 되어가고 있었따. 한 3주 정도 그렇게 살았을 때에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의 차원에서 ‘앞으로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한다고?’ 라고 했을 때 그게 버겁게 여겨지거나 한숨이 나오면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겠지만, 소진되는 느낌도 없었고 오히려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2주 전부턴가, 성당에서의 일이 바빠지고, 직장에서의 일이 바빠지면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요새 ‘내 일은 쓰기와 읽기’라는 것에 고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조금은 이기적인 상태였는데, 그 외의 내 시간에 대해 매우 인색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와 충돌하는 것도 심적인 부담이었고, 그런 시간 안에서 운동도 하고, 장거리 출장과 직장에서의 회식, 예비군 훈련, 면접진행 등을 이어가면서 내 시간을 외부에 많이 빼앗기게 되었다.
내 의지력과 내 몸은 별개의 것이었는지,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내 몸엔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했고, 한 이틀은 늦잠을 자버린 것 같다. (10시쯤 일어나는) 나는 항상 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잠에 드는 축이었는데, 콘서타를 먹으면서 많은 부분 개선이 되긴 했지만, 피로가 쌓여 아침잠이 많아지는 경우는 내 의지나 지병과는 별개인 듯했다. 더구나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야하는 직장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잠으로 보내고나면 하루를 망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 씻고 출근을 해서, 작업 공간에 가야하는 일이었다면 내 몸의 피로와는 상관 없이 어떻게든 끌려가긴 했을 거다. 물론 그런 삶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부족으로 망친 하루에 대해 더 날선 감각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삶의 반동이라는 건, 오랫동안 이어온 습관 같은 거랄까. 신체의 항상성이랄까. 눈에 보이는 것에서는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습관을 하루아침에 고치기는 어렵다. 며칠 되지 않아서 다시 거기로 돌아가게 된다. 무의식 중에 늘 하던 행동을 다시 하게 되는 식이다. 혹은 늘 해오던 행동과 삶의 양식을 바꾸는데에 있어서 고통이 수반되거나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경우에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 의지력도 소모적인 자원이라서, 어느 순간 소진되기 마련이다.
소진된다, 라는 걸 요새 자주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관계에 있든, 어떤 감정 안에 있든, 소진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어떤 일에 몰두하고 있던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매우 잘해내고 있던 사람에게 일을 믿고 맡기고 계속해서 일을 주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소진되어 일자리를 떠난다. 관계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던 어떤 사람도, 돌아오는 것이 없다거나 통하는 것이 없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소진되어 그 관계를 떠난다. 어떤 감정은 그 순간에는 절절하고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도 느껴지지만 몸이 지치든 마음이 지치든, 시간에 풍화되든, 삶이 자신을 치든간에 어느 순간 소진되어버리기도 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소모적인 자원이고, 피로감에 따라 그 소모는 가속화 되기도하고, 조금 늦춰지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결말에 이르렀을 때 소진된다는 건 비슷하지만. 물론 외부에서 계속해서 어떤 에너지를 부어줄 수도 있겠다. 그 에너지가 어떤 종류, 어떤 방식의 것들인지는 좀 더 생각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여하튼 내가 말하고자하는 삶의 반동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지만, 내가 이번에 느낀 반동은 피로감에서 오는 신체의 반동이었다. 의지는 있었지만, 신체가 피곤해서 무너지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반동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반동에는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우연에 의한 반동도 있는 것 같다.
직장에서의 일이 삶을 흔드는 건 충분히 개연성이 있고 예측가능하다. 몸에 쌓이는 피로감이나 이상징후들도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하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경제상황에 따라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단순히 자신의 오래된 습관으로 인해 다시 삶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우연하게, 속된 말로 ‘억까’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삶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도 종종 있다. 억울하고, 설명하기 어렵고, 개연성을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공교롭게도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일이 때마침 일어나기도 한다.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니고…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그건 내 의지와는 별개니까, 삶의 반동이라고 우선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건 나를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든 나를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대체로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서 자신을 흔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건 정말 많다. 어쩔 수 없는 것도 많고, 엎질러져버리는 것도 너무나 많다. 갑자기 쏟아져버리고, 갑자기 무너져버리고,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그걸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여튼, 어제도 늦잠을 잤다. 스무살 때부터 몸에 품고 있던 헤르페스도 올라왔다. 내일부터 화요일까지 대전에 출장을 간다.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일어나자마자 씻고 집 밖을 나와 강의도 듣고 산책도 하면서 다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 라고 하면 조금 넋이 없어지지만, 그냥 일찍 일어나는 것, 노트를 펼쳐보는 것.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에 책상에 앉아 홍차도 우려보고, 음악도 들어보고, 그렇게 해보다 내가 먼저 떠서 해를 맞이해보는 것. 그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 루틴이라는 걸 문득 알고리즘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 하루키는 다섯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소설이 아닌 것을 쓰거나 읽고, 운동도 하고, 좀 쉬는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옛날에는 굳이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는지, 왜 그렇게 일찍 잠에 들고 규칙적으로 사는지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요새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온전히 나로써 쓸 수 있는 시간은 이른 아침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뜨고 나면, 일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내가 마주해야하는 관계들이 있고, 소음이 있다. 저녁에는 약속들이 있고, 메세지와 전화가 있고, 그런 와중에 내 몸에 쌓인 피로가 있다. 그래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나 싶다. 문득 아홉시쯤 되면 ‘나는 가볼게’하고 자리를 떠나던 이 모 작가가 떠오른다. 아홉시는 조금 인색한 것 같긴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으로는 열시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자리는 대체로 생산성이 없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건 열시 넘어서까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나면 집에 들어와 일찍 자기는 어렵고,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기 어렵고, 피로도가 쌓이는 건 당연하다. 피로도가 쌓이면 몸은 느려지고 또 잠에 빠진다. 그렇게 온전했던 루틴은 조금씩 금이 간다.
뭐 그렇게까지 살아야하나 싶지만, 온전히 ‘나’로 살아간다는 건 삶의 반동에서도, 우연찮게 찾아오는 어떤 이벤트들에서도 ‘나’의 루틴을 잃지 않는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이 있든 ‘그렇게 해야하만’ ‘나’가 ‘새벽에 일어나’게 된다. ‘나’로 사는 건 어렵다. 하지만 중요하다. 관계 안에서의 ‘나’도 있다. 공동체 안에서의 ‘나’도 있다. 다 중요하다. 하지만 중심에 있는 ‘나’가 흔들려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아직 공개도 하지 않았지만 남몰래 확인하고 읽고 있던, ‘왜 요즘 브런치스토리 안 올리심’이라고 지난 목요일 밤에 봉창을 두드려준 진호에게 감사한다. 그날 나는 포트와인을 마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