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낭비와 함께 온다
우리 가족은 지금 여름 휴가로 태국을 여행 중이다. 작년 7월에 오고 꼭 1년만에 다시, 작년의 코스 그대로 다시 태국을 찾았다.
어제,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룸으로 들어가려 하려던 참에 아이가 말했다.
‘엄마 방에 있는 책 가지고 와서 여기서 책 좀 읽다가 가면 안돼?’
몸도 젖어있고하니 방에 가서 깨끗이 씻고 개운하게 책을 읽는 게 어떻겠냐는 내 말에 아이는, ‘여기서 읽는 게 더 낭만적이잖아~’ 라는 한 마디로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낭만.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분위기, 낭만, 이런 말들을 좋아하던 아들이었다. ‘아기가 희한하네 분위기를 이렇게나 따지고’ 하며 웃고 넘어간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어제는 여유가 넘쳐서 그런지, 마침 며칠 전 읽었던 책의 내용이 떠올라서였는지 괜히 그 ‘낭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낭비 없는 낭만은 없다.’
최근에 책에서 읽은 문장이다.
낭비와 낭만의 ’낭‘은 같은 한자(물결 랑 - 浪)를 쓴다. 두 단어 간의 거리가 무척이나 먼 것 같지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영 납득이 안되는 것도 아니다.
낭비의 건너편에 서 있는 말을 굳이 꼽아보자면 ‘효율’ 정도가 될 것인데, 효율적인 삶 속에서 낭만을 찾기는 꽤나 어렵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을 떠올리니 ‘굳이’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당장 이번 여행만을 되돌아 보기로 했다. 첫 번째, 10일 남짓되는 제법 긴 여행이라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꽤 많았는데, 우리는 굳이! 꾸역꾸역(말 그대로 꾸역꾸역) 각자 읽을 종이책을 두 세 권씩 챙겼다.
이번 여행에서 읽어야지, 하고 사 놓고 한 달여 간을 굳이! 아껴 두었던 책을 가져와 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읽고, 숙소에서도 읽고, 카페에서도 읽었다.
우리나라의 책이 종이의 색깔과 질을 워낙 따지다 보니(또 양장이 많은 것도 한몫한다) 무게가 다른 나라에 비해 서너 배는 될 정도로 무겁다. 돌아갈 때
쇼핑 목록을 과감하게 포기할지언정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우리의 낭만.
두 번째, 방콕의 랜드마크 왓아룬이 보이는 식당을 굳이! 두 달 전 오픈런으로 예약해서 방문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인간으로서 그간 많은 나라들을 다녔지만 단 한번도 어떠한 ‘뷰’를 위해 돈과 시간을 써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엔 왠지 모르게 꼭 이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로컬 식당의 음식들도 정말 좋아하지만 - 그리 큰 돈을 쓴 것도 아닌데 가족과 함께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내 여행 스타일 상 자주 할 것 같지는 않은 행동이긴 하다.)
세 번째, 지금 태국은 우기라 스콜과 같은 비가 수시로 왔다갔다 한다. 어제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도 빗방울이 드는 듯 마는 듯했다. 점원이 실내 좌석으로 가겠냐고 물어봤지만 굳이! 실외 좌석에 앉아 (살짝) 조마조마해 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비는 오지 않았고, 덕분에 방콕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낭만적으로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각자의 낭비가 있는 곳에 각자의 낭만이 존재한다.
‘낭비’라는 말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바로 자신만의 ‘낭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내가 낭비하는 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그 속에서 나의 소소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낭만적인 삶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나라, 똑같은 도시, 똑같은 호텔을 왜 또 가?’
이번 여행을 앞두고 들은 말이다.
덕분에 우리는 작년에 왔던 식당을 다시 가서, 우리 기억해? 1년 만에 다시 왔어! 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공사 중이던 여기가 벌써 이렇게 변했네 하며 추억을 공유할 수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지금,
낭만적인 여행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