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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유 Jul 16. 2024

할머니의 봉선화연정

천국에서의 가요무대를 기원하며.

'트로트 4대 천왕' 현철 별세
              -  봉선화 연정 등 히트곡 다수


오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트로트 가수 '현철'님께서 돌아가셨다. 이 분의 노래를 듣고 즐기며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기사를 보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 아파왔다. 현철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서이다.


"할머니! 다른 것 좀 보자~ 저 아저씨 이상하게 생겼다~ 노래도 안 좋다~"
"젊어서는 잘생겼는기라~ 노래도 가만히 들어봐~ 그라믄 좋아"

할머니집에 놀러가면 항상 잘 시간 즈음 틀어져 있었던 '가요무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할머니의 '최애'는 단연 현철이었다.

봉선화 연정을 할머니 특유의 느릿한 박자로 흐뭇하게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소온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언~ 거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쭈욱 근처에 살면서 정을 쌓았던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나의 친한 친구였다.


한국사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갈 때 쯤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근대사에 대해 너무 궁금하던 중, '아! 할머니가 1932년부터 살았으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되겠다!' 하고 할머니를 찾아가 이것저것 질문을 마구 던졌다. 착하고 친절했던 우리 할머니는 흐릿한 기억을 꾸역꾸역 떠올려 내 질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할머니도 일제시대에 창씨개명 했나??"
"하마 했지~ 요시모토 후미코 아이라~그때 일본 이름으로 안 바꾸면 살 수가 없었는기라"
"그래도 어떻게 창씨개명을 할 수 있노! 요시모토 후미코라니 할머니는 매국노네 매국노~"


일제시대를 살아 온 할머니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놀리던 초등학생 손녀,  그게 나였다. 이후로도 툭하면 요시모도상~ 요시모도상~ 하면서 할머니를 놀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차암내~" 하면서 웃어 넘기던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엄마도 모르는 엄마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명할 정도로 울고 불고 예민했던 나. 우는 것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소문이 자자했던 것은 물론이고 식당에서 쫓겨난 적도 있어서 모임도 갈 수 없었다는 것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엄마아빠의 육아썰이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울었는지~ 엄마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했던 엄마의 말이 웃기면서도 괜한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게 도대체 왜 그렇게 운거지, 한 대 칵 때리지 그랬나~'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후 어느 날, 할머니는 나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느그 엄마가 어릴 때 그래 많이 울었던 기라, 울고 짜고 해서 방에 눕혀 놓지도 못했어여, 지가 그랬는 거는 할머니한테 꼭 비밀로 하라카고 니가 울었다고 자꾸 머라하제, 니가 다 느그 엄마 닮았는 기라"


할머니는, 엄마가 몇 번이고 니가 많이 울어서 키우기가 힘들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 괜히 내가 웃어 넘기면서도 미안해 하는 모습이 - 영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내가 너무 많이 울어 힘들어할 때, 할머니에게 '니가 그렇게 많이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어린 시절 비밀 아닌 비밀을 내가 다 클 때까지 조용히 지켜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지못하고 성인이 된 나에게 털어놓은 할머니 그 둘의 (더이상은 비밀이 아닌)비밀이 너무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다.




2014년. 자궁암으로 수술을 했던 우리 할머니는 결국 암을 이기지 못했다. 야속하게도 재발해 버린 암은 늙은 할머니를 급속도로 무력하게 했다.


이 시기, 동생은 군대에 가 있었고, 나는 갓 임신을 확인한 상태였다. 산부인과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과, 아기 심장소리가 들리는 파일을 핸드폰에 담았다. 곧장 병실에 있는 할머니에게로 가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고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다.


"아이고 세상에, 반갑다. 참말로 반갑다~ 니는 일해야 되니까 느그 엄마하고 내가 애기 다 키워주끼여"


그런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아서,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병실에서 나오는 길에..참 많이 울었다.


이후 한 달이나 지났을까, 결국 할머니는 우리 아이를 보지 못하고 떠나셨다.


입덧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토하고 누워있느라 마지막 한 달을 할머니에게 자주 가지 못했다. 억지로 한번씩 찾아가도 늘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나를 마지막까지도 걱정했던 할머니. 할머니의 장례를 치를 동안은 울고 또 우느라 그토록 극심했던 입덧이 뭔지도 잊을 정도로 정신을 놓았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할머니의 49재 날.

새벽에 뒤척이며 꿈을 꾸었다. 마치 잠을 깨서 실제로 보았던 것처럼 생생한 꿈이었다. 곱디 고운 한복을 입고 내 옆에 누워 나를 쳐다보던 할머니. 입덧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던 내 모습에 안심이 되었던 건지, ‘마 이제 됐다, 이제 됐다‘ 하면서 편안한 표정으로 떠나던 할머니.


가시는 길 끝까지 나를 예뻐했고 나를 걱정했던 할머니.


현철 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다시 떠오른 할머니와의 추억. 내 어린시절 소중한 우리 할머니에게 큰 기쁨을 주셨던 현철님의 명복을 빌며, 살아생전 TV 속에서만 보았던 '최애'의 노래를 천국에서는 아주 가까이서, 듣고 즐기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소온대면 토~옥 하고~ 터질 것만 같언~ 거대~"



할머니가 너무 그립고,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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