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부치는 편지
나이를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야지
넌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
나잇값.
검색해보니 영어로도, 일본어로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들이 있다. 어떤 문화권에 살든, 인간이라면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는 증거가 되겠다. 나잇값. 이미 10대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그 단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자면 사실 10대 정도는 나잇값씩이나 하고 살 나이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잇값이라는 말에 대해 조금 깊이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나잇값을 계산하는가. 상대의 말이나 행동거지가 못마땅할 때, 방향을 바꾸어 '나'의 솔직한 감정을 들여다 보는 순간에도 나잇값은 철저히 계산된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금 내 감정이 어른스러운 것인가'에 따른 검열이 까다로워지는 탓에 타인에까지 그 검열 기준을 적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슬픔을, 20대 때는 주로 기쁨과 분노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나잇값 못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 되었는데 그렇게 울면 어떡하니'라든지, '형아가 됐는데 울면 안되지'라든지 하며. 또 기쁜 일에 너무 기뻐한다거나, 분노를 너무 겉으로 드러낸다거나 하면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나이를 먹으며 기쁨과 슬픔과 분노를 절제하는 방법을 배워왔다.
3, 40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또 다른 감정의 검열대에 직면하게 된다. 기쁨과 슬픔, 분노를 절제하는 것에 익숙해지마자, 이제는 서운함이나 질투와 같은 감정에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낙인이 찍히기 시작한다. '나잇값'을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기보다는 '내가 너무 유치한가?'라는 자문을 먼저 하게 된다. 질투심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에 이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돼'라는 자기 검열이 앞선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감정에 솔직해지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간다.
나잇값이라는 이름은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때로는 부정하게 한다. 마치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감정의 폭을 줄이는 것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잇값일까? 나이 듦에 따라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솔직하고 성숙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정한 나잇값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나잇값이라는 말은 우리의 감정을 제한하는 도구가 아니라, 더 깊고 풍부한 감정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나침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기쁨이, 슬픔이, 분노가, 질투가, 서운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나잇값을 한다는 것이 감정을 숨기는 것만을 의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지혜롭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가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요 며칠 서운한 일에 서운하다 하지 못하고 혼자 속을 끓였다. '이 나이'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영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감정을 성숙한 방식을 통해 전달할 만큼 내공이 쌓이지도 않았다(이런 내공은 언제나 쌓일 수 있을까). 혼자 자책하며 '나잇값'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짐했다. 나이를 핑계로 감정을 숨길 것이 아니라 나만큼은 내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쓰다듬어주자고.
나는 글쓰기의 치유 기능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