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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유 Jul 05. 2024

우리 반 아이가 자퇴했다

잘가, 가지마. 행복해, 떠나지마.

6월 28일, 우리 반 아이가 자퇴를 했다.

요즈음 고등학교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드물지는 않지만, 우리 반 아이가 중간에 학교를 나가는 것은 14년 교직 생활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3월, 입학식 이후부터 줄곧 힘들어하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마음을 열기 힘들어했고, 친해진 친구의 무리에 다른 친구가 끼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어떤 수업 시간에 몇몇 아이들 때문에 반 전체가 혼난 일이 있었는데 그 반에 자기가 포함되어 함께 혼났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자신의 본 실력이 드러날까 무섭다며 수행평가가 있거나 지필평가가 있을 때는 영락없이 결석을 했다.


그렇게 3월부터 갖가지의 이유로 힘들어하는 아이와, 하루가 멀다하고 상담을 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자신의 예민하고 까칠한 본 모습을 숨기고 가식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고, 나는 그것은 가식이 아니라 배려라고 말했다. 또, 자신의 그림에 대해 지적을 하는 선생님의 의견이 불쾌하다고 말했고(그림을 전공으로 하는 학교이다), 나는 우리가 완성형이 아니기에 배우는 것이며 지적받고 생각하고 나아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루걸러 하루, 아이와 상담을 하고 일과 시간 이후에도, 주말에도 아이의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아이가 이러저러한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행히 아이의 부모님은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셨다) 이러한 성향을 고치기 위해서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힘들더라도 부딪히고 깨지고 피가 나고 딱지가 앉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는 이미 자퇴를 원하고 있었고 아이의 부모님과 나는 고등학교 생활이 어쩌면 아이가 편안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자퇴는 아니라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나의 권유로 아이는 상담 센터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당연하게도 효과는 즉각적이지 않았다. 이후로도 3-4개월 동안 아이의 불만은 계속 끊이지 않았다. (기숙사 학교라) 주말에 집에 가고 나면 갖은 핑계로 월요일, 화요일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정말 아픈 게 아니라면 일요일 저녁에 단호하게 학교로 보내주시라 이야기했지만 부모님도 아이를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나도 점점 지쳐갔다. 솔직한 심정으로 차라리 그냥 자퇴를 했으면,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6월의 어느 월요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이 대신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선생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아요, 그리고 내일 학교에 가서 제 생각을 말씀 드릴게요.'


올 것이 왔구나.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에 대한 허무함과 무력함, 또 한편으로는 후련함. 그 후련함 때문에 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함께 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다음날 학교에 와서, 부모님과 의논이 끝났다며 6월 28일까지만 학교를 다니고 자퇴를 하겠다고 말했다. 일단은 아이를 교실로 돌려보내고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왜 마음을 돌리셨냐고.


'선생님....아이가 기숙사에 있으면 가끔씩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네요.....'


아이는 최강수를 던졌고, 부모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6월 28일까지, 일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마음이 정말 복잡했다. 

3월 이후 처음으로 아이와 상담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입학식 이후 아이의 가장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날,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는 아이의 등을 한번 두드려 주며 아이를 보내고 돌아오는데, 왠지 모를 눈물이 났다. 이럴 줄 알고 아이의 마지막 담임으로서 하고 싶은 말들은 편지에 적어 떠나는 아이에게 쥐어주었다.



그때의 내 눈물은 어디에서 온 걸까. 

아이를 결국 잡지 못했다는 자책일까, 혹은 아이의 자퇴를 담임으로서 나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교를 떠나는 아이가 안쓰러워서일까.. 여러 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인지편향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저연차 교사 시절의 나는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내 생각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우매함의 봉우리' 정상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교사로서의 삶에서 절망의 계곡에 있다. 아이들을 사랑할수록, 또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갈수록 아이들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또 두렵다. 이번에 아이의 자퇴를 처리하면서도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조금만 더 설득하고 조금 더 챙겼으면 아이는 학교를 떠나지 않았을까? 내가 아이를 포기한 건가? 아니면 할만큼 한 것일까? 어쩌면 아이의 행복은 학교 밖에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나와 함께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아이의 삶에 어떤 방향으로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한다. 학교 안이든 학교 밖이든 어찌됐든 이 아이가 편안함에 이르렀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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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를 결심하고 보였던 아이의 밝고 편안한 표정이 아무쪼록 오래오래 유지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 아이에게는 학교가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에서든 멋지게 살아내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마흔이 되면 베테랑 교사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다. 

지금의 고민들이 깨달음의 비탈길, 그 초입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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