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이도 언니가 있다
살면서 동물에 대해 가져본 느낌은 싫다, 무섭다 – 대개 이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내 인생에 동물을 키우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배는 때로는 정말 상상치 못했던 곳으로 방향키를 움직인다. 나는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며 사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했다. 지금 우리 집에는 사람 세 명, 고양이 두 마리가 산다.
뚱이와 고양이 두 마리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자매’다. 뚱이가 숲이 언니, 가을이 언니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숲이와 가을이의 관계는 생물학적으로 ‘모녀’다. 동물과 사람과 모녀와 남이 만나 자매가 되다니 콩가루 집안 이야기 같기도 하다.
내 남편은 나를 만나기도 한참 전, 숲이가 낳은 4마리 새끼 고양이의 다리에 색실을 묶어 구분해 주고는 계절을 담은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내가 뚱이를 낳았을 무렵, 자기가 산후조리 유경험자라고 했던 생각이 난다. 비록 사람은 아니었지만. 결혼하지 않고 고양이나 키우며 혼자 살려고 했던 남자와 동물을 싫어하는 여자가 만나, 이제는 다섯 식구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나름 대가족인 셈이다.
이제 열네 살이 되어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나 다름없는 숲이는 언제나 뚱이 옆을 맴돈다. 뚱이가 레고 놀이를 하고 있으면 옆에 다가와 눈을 감고 쉰다. 밤이 깊어지면 어느새 나타나 뚱이 발치에서 잠을 청하고, 뚱이가 춤을 추고 있으면 옆에 대자로 누워 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숲이에게 뚱이는 여섯 살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담아서 준다. 일찍 일어난 날이면 아빠와 함께 츄르를 짜주겠다며 나선다. 피자를 먹고 나면 포장끈으로 숲이 언니 체육을 시켜주겠다며 끈을 흔들고 오두방정을 떠는데, 누구를 위한 체육인지 알 수가 없다. 나이가 많고 중성화수술 이후 몸이 무거워진 숲이는 어지간해선 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묘사하는 형용사는 많다. 예쁘고, 건방지고, 똑똑하고, 독립적이고, 하여간 많은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그 많은 수식어 중 숲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가족’이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남편을 꾹꾹 밟고, 이불 위로 새침하게 지나다니던 숲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밟지 않고 조심스레 피해 다녔다. 바로 내 뱃속에 콩알만 한 뚱이가 생겼을 무렵이다. 숲이는 그렇게 뚱이가 세상으로 나오기를 함께 기다려 주었다. 뚱이가 누워만 있는 아기였을 적, 뚱이가 누워서 숲이에게 두 발을 탁 올린 채로 놀면, 그대로 쿠션이 되어 주기도 했다. 문득 사냥이 하고 싶어서 온 집안을 우다다 달리다가도, 뚱이 위로 뛰어다니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고, 다시는 무엇도 키우고 싶지 않다고 다짐하지만, 숲이는 우리 가족이다. 뚱이의 소중한 언니.
그렇다면 가을이는? 오로지 아빠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