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진양호의 봄, 천천히 피어나는 목련꽃

막 피어나려는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by 허정호

봄은 늘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다.

“지금 가보면 딱 좋을 거야.”

동아리 취미활동을 함께하는 지인의 연락은 그렇게 짧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진양호공원 선착장에 목련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만개는 아니지만 막 피어나려는 봉오리가 더 예쁘다는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욕심을 냈다. ‘활짝 핀 모습’을 보기로.

그래서 이틀을 기다렸다.

월요일,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고, 마치 이 작은 봄 여행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근처에 사는 동서도 합류했다. 우약정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다. 봄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족쉼터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어쩌면 조금 돌아가는 길이 더 좋은 풍경을 만나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곧장 목련을 보러 가기엔 아쉬웠다. 꽃도 기다림 끝에 더 아름다워지는 법이니까. 우리는 양마산 팔각정까지 산책을 하기로 했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진양호 노을길 데크는 걷기 편안했다. 북카페로 향하는 데크길 양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나무들이 묘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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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데크길 오르막은 편했지만, 솔직히 조금 단조로웠다. 그래서 우리는 취수장을 지나 S자 데크를 넘어서며 옛 산책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사람의 발길이 조금 뜸해진 길은 오히려 더 살아 있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며 몸의 리듬을 깨웠고, 숨이 차오를 때마다 나무 사이로 호수가 더 가까이 다가옴을 느꼈다. 발아래는 흙과 낙엽, 그리고 드러난 나무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인위적인 계단보다 훨씬 다정한 지지대가 되어 주였다.

팔각정으로 오르는 마지막 길, 우리는 오래된 비스듬히 자리를 내어준 나뭇가지에 잠시 몸을 기대서 앉았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시간이 쌓였을 그 자리.

그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멈춰 있는 시간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도 옛길을 택했다. 데크보다 조금 더 힘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더 가벼웠다. 해 질 무렵이면 이 호수가 어떤 색으로 물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보지 않은 노을이 이미 마음속에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련을 보러 갈 시간.

진양호 버스정류소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두 그루의 목련나무가 반겼다.

크고 당당하게, 마치 이곳의 봄을 책임지는 듯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꽃은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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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가지에는 이미 활짝 핀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고, 위쪽으로 갈수록 봉오리들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성과 시작이 한 나무 안에 함께 했다. 그래서 더 신비로웠다.

아래 귀곡선착장에 내려가자 조용히 묶여 있는 순시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움직일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봄을 지켜보는 듯했다. 주변에는 막 피기 시작한 개나리가 노란빛으로 번지고 있었고, 멀리 방파제와 어우러진 목련은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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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고,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목련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은 부드러웠고, 햇살은 따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하루였다.

점심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지만 배고픔도 그리 급하지 않았다. 결국 근처 식당에서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따끈한 국물이 몸을 데우자 하루의 온기가 더 또렷해졌다.

동서집으로 가서 차 한잔을 하려던 계획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렀다.

요즘 중동 분쟁으로 금값이 내렸다는 동서의 말에 금은방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잠깐 들러 시세를 확인하고, 결국은 사지 못한 채 “다음에”를 기약하며 나왔다.

어쩐지 그 모습마저도 오늘과 잘 어울렸다.


무언가를 꼭 얻지 않아도 괜찮은 날.

대신 충분히 보고, 걷고, 느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목련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는 것.

활짝 핀 꽃보다,

막 피어나려는 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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