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통영 이순신공원과 세자트라 숲

— 맛과 바람, 그리고 함께라서 더 따뜻했던 하루(2026.3.21)

by 허정호

일요일로 잡혔던 점심 약속은 각자의 사정으로 토요일로 옮겨졌다. 그 덕분인지, 마음은 한결 가볍고 기대는 더 커졌다. 선암사와 금둔사를 함께 다녀온 조 소장님의 초대였고, 우리는 그 여운을 이어 다시 만나기로 했다. 최 원장 부부도 토요일 오후 일정을 접고 함께하기로 하면서, 일주일 만에 반가운 시간이 만들어졌다.


조 소장 집 앞에서 만나 통영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점점 바다의 기운을 머금어 갈 즈음,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레 부드러워졌다. 통영해안로에 접어들자 활어시장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북적이는 인파와 활기찬 소리가 이곳이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여행의 중심지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꿀빵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충무김밥집과 건어물 가게들이 이어진 해안로를 지나며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기다림마저 설레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예약해 둔 식당으로 향했지만 주차는 쉽지 않았다. 몇 바퀴를 돌며 애를 태우던 순간, 기적처럼 자리가 비었고 우리는 서둘러 차를 세웠다.


식당 앞은 대기 손님들로 붐볐지만, 미리 예약해 둔 덕분에 우리는 곧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전복돌솥밥을 주문하자 예상치 못한 선물이 따라왔다. 물회였다. 차갑고 새콤한 국물에 오징어와 국수, 신선한 채소가 어우러진 그 한 그릇은, 바다의 향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한 숟갈 뜰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곧이어 나온 전복돌솥밥은 더욱 근사했다. 고소한 밥과 전복의 쫄깃한 식감, 생선구이와 굴전, 담백한 나물 반찬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완벽한 한 상이 었다. 마지막으로 돌솥에 남은 누룽지에 물을 부어 숭늉을 만들어 먹는 순간, 그 따뜻함이 속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최 원장님이 조용히 계산을 마치고 돌아왔다. 초대를 했던 조 소장은 그저 웃으며 상황을 넘겼고, 우리는 그 소소한 해프닝마저도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함께라서 가능한 여유와 웃음이었다.


남은 오후, 우리는 통영의 바다를 따라 걷기로 했다. 세자트라숲 해안길에서 이순신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잘 닦인 산책로 대신 일부러 좁은 해안길을 택했다. 조금은 불편해도, 그 길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갈림길이 나오면 망설임 없이 바다 쪽 길을 골랐다. 그렇게 몽돌해안에 내려섰다.


해안에서는 미역을 채취하는 부부가 있었고, 한편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 이들이 웃음 가득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평범한 풍경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잠시 머무는 사이, 최 원장님이 직접 채취한 미역을 건네주었다. 입에 넣자 퍼지는 짭조름한 바다 향이 오래도록 입안에 머물렀다. 자연이 주는 가장 순수한 맛이었다.


데크 위 돗자리를 깔고 간식을 나누며 잠시 쉬었다. 요구르트와 귤, 빵과 차를 함께 나누는 시간은 소박했지만 충분히 풍요로웠다. 바람은 부드럽고, 햇살은 따뜻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오르내리는 해안길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데크길을 내려와 공원에 들어섰다.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 속에서도 각자의 평온이 느껴졌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찍고, 웃음을 나눴다.


동상 앞에 서서 자연스럽게 거수경례를 하고 잠시 묵념을 했다. 바다를 지켜낸 한 인물을 향한 작은 예의였다. 그리고 다시 웃으며 사진을 남겼다. 삶은 그렇게 엄숙함과 즐거움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공원 위쪽에는 목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하얀 꽃잎들이 봄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무장애공원 앞 벤치에 앉아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마저도 편안했다.


돌아오는 길은 잘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처음과는 다른 길이었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는 오늘의 바다와 사람, 그리고 함께한 시간들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통영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웃으며 만들어낸 하나의 따뜻한 시간이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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