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비 속에서 만난 봄의 마음
벚꽃에 홀린 날, 합천 청강사에서
가회면 소재지에서 대기마을로 향하는 길목, 그 시작에는 수령 350년을 버텨온 오도리 이팝나무가 서 있다. 5월이면 온몸에 하얀 꽃을 피워 마치 눈을 뒤집어쓴 듯한 장관을 이루는 나무다. 그곳에서 황매산 매표소까지 이어지는 길은 벚꽃이 터널을 이루며 봄을 품는다.
그 길을 지나 합천호 방향으로 500미터쯤 올라가면 구름재가 나타난다. 벚꽃이 흐드러진 계절, 고개를 넘다 보면 오른편 야산은 붉은 진달래로 수놓아져 있다. 도로 한편에 차를 세우고 임도를 따라 걷다가, 나는 뜻밖의 보물을 만났다.
진달래꽃 아래, 연분홍빛 얼레지 군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래 묵은 밤나무 밭 사이로, 떨어진 밤송이와 어우러진 얼레지들이 비단처럼 번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얼레지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꽃물결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서성이다가, 그 속에서 하얀 꽃 얼레지 두 송이를 발견했다. 사라져 가는 군락지라는 이야기에 기쁨은 곧 아쉬움으로 번졌다.
구름재를 넘어 양리마을로 내려가 장단마을을 지나 허굴산 방향으로 오르자, 산속에서 손짓하는 하얀 벚꽃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청강사였다.
절 입구부터 이미 봄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흘러내리는 꽃비를 아내는 연신 사진으로 담아냈다. 돌계단 양옆의 오래된 고목들은 짙은 승복을 입은 듯한 자태로, 온통 하얀 꽃을 뒤집어쓴 채 고요히 서 있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꽃잎들은 바위 위에도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청강사로 들어서는 길은 통나무 세 개를 엮어 만든 문으로 시작된다. ‘청강사’라는 이름이 걸린 첫 번째 문을 지나, 다섯 개의 문을 차례로 통과하는 동안 노란 개나리와 이름 모를 꽃들이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종무소 뒤편 장독대에서는 스님과 보살님이 분주히 된장을 담고 있었고, 우리는 “나중에 된장 좀 사갈까” 하며 웃었지만 결국 잊고 말았다.
두 개의 큰 바위 사이 ‘해탈의 문’을 지나지 않고, 우리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향했다. 넓지 않은 마당은 하얀 꽃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꽃이 내리고 있었다. 부처님도 이 풍경을 기뻐하시지 않을까.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내리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아내가 꽃비 속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조용히 대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모자와 배낭을 벗어두고, 지갑에서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내 복전함에 넣었다. 그중 한 장은 딸을 위한 것이었다. 올해는 꼭 좋은 길을 찾아 마음껏 꿈을 펼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벚나무 아래에서 스님이 방문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절의 포토존입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가지가 길게 드리운 자리 아래 앉았다. 머리 위로는 하얀 벚꽃 다발이 우산처럼 펼쳐져 있었다. 서로 마주 보며 웃는 얼굴이 꽃과 어우러져 더 환하게 빛났다.
맞은편 넓은 바위에 자리를 잡고, 떨어진 꽃잎 위에 앉아 간단한 점심을 나눴다. 고구마와 구운 마, 사과, 그리고 따뜻한 생강차. 소박했지만 그 어떤 식사보다 깊은 봄의 맛이었다.
우리는 다시 포토존으로 돌아가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꽃잎이 내려앉은 바위 위, 벚나무를 우산 삼아 하루 종일 머물러도 싫증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합천호 백리 벚꽃길이 손짓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봄에 완전히 홀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