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청곡사와 두방사 길에서 마주한 봄의 숨결

산책길에서 만난 진달래와 제비꽃

by 허정호

오늘은 봄이라기보다, 이미 초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듯한 날이었다. 공기는 한결 가벼웠고, 햇살은 한층 깊어져 있었다. 불과 3월 초, 동네 공원을 걸으며 매화가 조심스럽게 꽃망울을 터뜨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봄은 수줍고 느렸지만, 지금의 봄은 분명히 다르다. 성큼, 그리고 힘차게 다가와 있었다.


3월 중순이 지나면서 나는 발걸음을 월아산으로 옮겼다. 조금 더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또렷이 뛰는 길을 찾고 싶어서였다.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청곡사는 완연한 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절로 들어서는 길목의 매화는 이미 꽃잎을 흩날리며 계절의 바통을 넘기고 있었고, 입구의 신기소류지에서는 수양벚꽃이 긴 가지마다 꽃을 가득 매달고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하얀 꽃잎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조용한 폭죽놀이 같았다.

일주문 옆 호수는 또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 위에 비친 월아산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고, 호숫가의 목련은 어느새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호수를 따라 새롭게 단장된 진달래들도 빠짐없이 피어나, 마치 방문객을 환영하는 듯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청곡사에서 체육장으로 이어지는 600m 돌계단 길. 그 길을 오르며 나는 계절이 땅속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파릇한 새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돌계단과 계곡 사이, 소나무 아래에는 유독 진달래만이 붉은빛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록과 붉음이 어우러진 그 풍경은 묘하게도 가슴을 울렸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과는 달리, 두방사로 이어지는 소나무길은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깊은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좁은 산책로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보랏빛 제비꽃이었다. 작고 소박한 그 꽃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자연스레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들까지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몇몇 나무에만 피어나던 꽃들이, 오늘은 완전히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방사까지 이어지는 1km 길 양옆은 그야말로 진달래의 천국이었다. 산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 속을 걷는 나는 마치 꽃의 물결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무덤가에 유난히 붉게 핀 진달래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곧 떨어질 꽃이라는 걸 알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 애틋하게 다가왔다.

돌아오는 길, 들른 청곡사 카페는 점심을 마친 방문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조용히 종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용두어신 형태의 목어와 해태상이 받치고 있는 북은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시간과 이야기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입구에서 만난 황매화와 목련. 봄의 전령사처럼 서 있던 그 꽃들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사진을 남겼다. 오늘의 이 풍경과 감정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봄은 그렇게, 어느새 내 안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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