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순천 선암사와 금둔사의 매화 향기

매화 향기 따라 걷는 봄의 산사

by 허정호

매화 향기 따라 걷는 봄의 산사(2026.3.15. 일요일)

순천으로 향하던 그날 아침, 여행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할 사람들을 기다리며 차 안에서 나눠 먹을 빵을 몇 개 샀을 뿐이다. 차 안에 퍼지던 빵 냄새와 함께 여행의 분위기도 익어갔다.

10시 40분쯤,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조금 놀랐다. 많은 사람들이 봄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고, 입구 쪽은 보수 공사까지 겹쳐 마치 줄을 서서 들어가는 듯한 북적임이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가족 단위의 방문객과 젊은 여행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우리는 조금 더 안쪽, 식당가 외곽에 겨우 자리를 잡고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완만했다. 약 20분 남짓, 서두르지 않고 걸어도 충분한 거리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풀리고, 긴장감도 사라졌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승하교 위에 서자 승선교와 강화루가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일주문 앞에 서서 안내판을 읽으며 다시 한번 놀랐다. 선암사에는 무려 15점의 보물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선암사와 송광사 일원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선암매는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방문했던 곳인데도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니,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자 선암사는 여느 절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건물들이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어, 마치 조용한 미로 속을 걷는 듯했다. 전각과 전각 사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고, 그 안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대웅전에는 오직 석가모니불만 모셔져 있어 단정하고 고요한 느낌이 더욱 깊게 전해졌다.

그 뒤편,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선암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몽글몽글 맺힌 꽃봉오리는 오히려 더 큰 기대를 품게 했다. 늘어진 가지가 기와지붕과 돌담에 기대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완성된 그림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저장되는 기분이었다.

원통각으로 오르는 담장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특히 문에 새겨진 목련 문양은 섬세하면서도 단아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사진을 남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차밭으로 이어지는 쪽문 너머로 보이던 홍매화는 또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담장 너머로 살짝 드러난 붉은빛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선암사 뒤뜰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매화와 홍매화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기 위해 분주했고, 우리 역시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섞였다. 낮은 황토 돌담 위에 얹힌 기와는 이끼와 금 간 흔적을 품고 있어, 마치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어디선가 짙은 향기가 말려왔다. 향기를 따라가 보니 세 갈래의 가지 위에 연한 노란 꽃봉오리가 고개를 숙이고 피어 있었다. 처음 보는 나무였는데, 삼지닥나무라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강한 향기를 품고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겸손하게 느껴졌다.

아쉬움에 다시 선암매를 찾았을 때는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결 여유로웠다. 우리는 천천히 꽃을 바라보고, 함께 서서 단체 사진도 남겼다. 그렇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홍매화를 찾아다닌 시간은 짧았지만 깊었다.

절을 나오기 전 이 절의 명물인 뒷간과 작은 연못에 누워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를 보며 오랫동안 이곳을 지켜는 보물로 남아 주기를 바라며 일주문을 나왔다.

사찰을 나와 식당가로 내려오니 또 하나의 고민이 시작됐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점심을 사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최원장은 바지락 정식을 먹자고 했지만, 절을 다녀온 뒤에는 왠지 산채비빔밥이 어울린다고 했지만, 산채정식으로 결정됐고 포고버섯 구이가 특별히 맛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한국에서 제일 일찍 피는 홍매화가 있다는 금둔사다.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계곡 위 방하교와 그 주변을 가득 채운 홍매와 청매가 눈을 사로잡았다. 입구에 자리한 ‘강마다 뜨는 달’이라는 이름의 카페와, ‘차 일곱 잔의 노래’라는 시구는 공간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고 있었다. 내려올 때 차 한잔 하기로 약속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간 대웅전 앞뜰에서는 동백나무와 매화가 어우러져 또 다른 봄의 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금둔사만의 보물, 납월매를 찾아 산신각 쪽으로 향했다. 둘째와 셋째 나무는 활짝 피어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듯했고, 그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사진을 남겼다.

산신각 뒤편 계곡 산책로는 그야말로 매화길이었다. 흐르는 물과 꽃,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용히 어우러졌다. 금둔사 석불입상과 삼층석탑 주변까지 매화가 만개해 있었고, 석불 곁에 핀 홍매화는 마치 미소를 머금은 얼굴처럼 빛났다.

석불입상 뒤편 코끼리상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중, 출입금지 안내 방송에 놀라 다시 내려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렇게 돌아 내려오는 길에서 마침내 만난 첫 번째 납월매는 이미 꽃이 지고 있었지만, 그 붉은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매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빙하교를 지나 일주문으로 향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른 시간.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낙안읍성은 성곽 안에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살아 있는 마을이었다. 낮은 돌담과 초가집,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골목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준다. 성곽 위에 올라 바라본 들판은 봄빛으로 부드럽게 물들어 있었고, 바람은 천천히 마을을 스치며 지나갔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머무는 풍경이었다.

이날의 여행은 매화를 보러 떠난 길이었지만, 결국은 시간과 향기를 따라 걷는 하루였다. 피어나는 꽃과 지는 꽃, 오래된 돌담과 사람들의 웃음이 겹쳐지며 하나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아마도 다음 봄이 오기 전까지 은은한 향기로 마음 한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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