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춘란이 알려준 산책의 기쁨

물소리와 향기의 길

by 허정호

물소리와 향기의 길


점심을 먹고 산책길을 나섰다.

몇 명이 함께 걸을 때도 있지만, 나는 혼자 걷는 걸 더 좋아한다. 혼자라서야 비로소 길이 보인다. 발길 닿는 대로, 눈길 머무는 대로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산책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사무실 앞 개울을 따라 저수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초여름이 제격이다. 저수지 주변에 산딸기가 지천이어서, 손끝마다 여름의 달콤함이 묻어난다.

논길을 따라 산 아래 축사를 돌아 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사람 냄새가 나는 길이다. 마주치는 이웃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다 보면, 그날 하루가 한결 따뜻해진다.

또 하나, 보건진료소 옆으로 난 농로를 따라 장재못을 거쳐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은 따로 있다. 교회 뒤편으로 돌아 마을 끝 농로로 이어지는 길. 그 길의 끝에는 큰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옆에는 자그마한 절집이 있다. 논길이 끝나고 산으로 접어들면 임도 옆으로 두어 채의 농막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길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개울 끝 소나무밭 아래에는 솔잎으로 덮인 ‘보물’이 숨겨져 있다.

여름엔 풀들이 무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늦가을, 낙엽이 지고 풀들이 노랗게 시들 무렵, 소나무 아래 바위 사이에서 노란 솔잎 틈새로 푸른 잎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호기심이 발끝을 재촉했다. 작은 나무들을 헤치고 바윗돌을 징검다리 삼아 다가가 솔잎을 걷어내자, 파란 춘란 잎이 우산처럼 펼쳐져 있었다. 옆 언덕배기에도 두 포기가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나도 봐주세요” 하는 듯.

그날 이후, 나는 그 길을 ‘춘란길’이라 불렀다.

다음날에도 발걸음은 그곳을 향했다. 전날 보았던 세 포기의 춘란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노란 솔잎과 바위를 헤치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바위틈마다 숨어 있는 춘란들이 눈에 띄었다. 자연이 숨겨둔 선물이었다. 돌아오는 길, 결국 두 포기를 조심스레 옮겼다. 흙이 묻은 채로 비닐봉지에 담아 사무실로 데려와, 오래된 양란 화분에 나란히 심었다. 물을 가득 담은 통에 하루를 재워 두었다가 책상 위로 옮겨 놓았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초봄이 찾아왔다. 두 포기 중 하나는 세상을 떠났고, 남은 한 포기에서 꽃대가 솟았다. 궁금증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다시 춘란길을 찾았다. 계절은 겨울을 털어내고 있었고, 돌틈 사이 마른 풀잎 아래에서 춘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자연 속에서 자란 녀석들은 확실히 더 빨리 꽃을 피웠다.

그날, 나는 또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돌틈 사이 수줍게 고개 숙인 춘란이 “나를 데려가세요” 하는 듯했다. 조심스레 풀잎을 걷고 모자를 벗어 그 안에 담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종이컵에 마사를 채우고 임시로 심었다.

다음날 아침, 문을 열자 향기가 퍼졌다. 피어나지 않은 꽃망울에서도 은은한 향이 새어 나왔다. 결국 나는 또 한 송이를 옮겨와 하얀 사각 화분에 두 포기를 나란히 심었다. 세 송이의 꽃대에서 피어난 향기는 하루 종일 사무실을 감쌌다.

퇴직을 하면서 춘란을 시골집으로 옮겨와 감나무 아래에 심었다.

한 포기는 세월 속으로 스러졌고, 두 포기는 여전히 봄마다 수줍은 꽃을 피운다. 그 향기를 맡을 때마다, 나는 다시 그 산책길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노란 솔잎을 걷어내며 처음 만난 그날의 설렘과, 조심스럽게 모자에 담던 떨림이 향기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 자연이 준 한 송이,

그건 ‘기다림’과 ‘조심스러움’이었던가.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21화21. 미역나물이 된 소고기미역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