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비가 멎은 하루, 고구마를 캐다

흙냄새와 함께 엮어낸 부부의 가을 하루

by 허정호

비가 멎은 하루, 고구마를 캐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며칠째 이어진 가을비가 잠시 멎은 하루였다.

시골집 마당 텃밭에 심어 둔 고구마를 캐지 못했던 우리는,

비가 그친 틈을 타 일찍 길을 나섰다.

텃밭이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그동안 줄기를 따와 반찬을 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늘도 줄기를 따야 하기에,

아내와 나는 조심스럽게 고구마 줄기를 걷어 마당 잔디 위로 옮겼다.

비닐을 걷자, 고랑이 가지런히 드러나며

오랫동안 비닐 속에 갇혔던 흙냄새가 코끝으로 물씬 올라오는 듯했다.

창고에서 엉덩이 방석의자와 호미를 꺼냈다.

아내는.

“호미로 캐면 상처 나, 쇠스랑으로 해야지.”

그럼에도 나는 호미로 먼저 해보기로 했다.

첫 줄에서 작은 생수병 만한 고구마 두 개가 쑥 올라왔다.

“와, 이거 봐!”

아내는 웃으며 “나도 재미 좀 봐야겠다”며 쇠스랑을 들고 나왔다.

놀랍게도 아내는 상처 하나 없이 능숙하게 고구마를 캐냈다.

고구마는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큰 놈은 애기 얼굴만 했고, 작은 것들은 귀엽게 달려 있었다.

호미로는 버거워 삽을 가져왔더니,

수월하긴 했지만 몇 번이나 고구마를 두 동강 내 버렸다.

“그럴 줄 알았어.”

아내는 웃으며 쇠스랑을 내게 건네고, 대신 줄기를 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었다.

나는 고구마를 캐고, 아내는 줄기를 따서 모았다.

“이건 언니한테 좀 보내야겠다.”

아내는 버려지는 고구마 줄기를 아까워하며 상자 하나를 꺼냈다.

식당이 한가할 때를 골라 비빔밥집으로 가서 식사했다.

돌아오니 어느새 한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고구마 몇 개와 줄기를 상자에 담고 테이프를 붙이고, 농협 택배 사무실로 향했다.

직원이 보이지 않아 상자를 저울 위에 올려두고 옆 사무실로 갔다.

“2시까진데 좀 늦으셨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택배 담당자가 말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2시를 조금 넘겼다.

믹스커피를 타 마시며 기다리는데,

택배 직원이 와서 송장을 뽑아 주었다.

박스에 송장을 붙이고 하적장으로 옮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따라오던 직원이 커피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이거 두고 가셨어요.”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하수구 옆에 버리려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커피와 함께 윗옷 주머니 속 카드가

툭—하고 떨어져 하수구 속으로 사라졌다.

뚜껑은 단단히 고정되어 열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달려가 “집게 좀 빌려주세요” 하자,

그는 집게가 없다며, 긴 자루가 달린 전정가위를 가져왔다.

가위를 넣어 카드를 집었지만,

미끄러지면서 카드는 흙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렸다.

결국 포기하고 카드사에 분실신고를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잠시 쉬며 배를 깎아 먹고, 남은 고구마를 마저 캤다.

며칠 내린 비에 고구마 몇 개는 썩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풍성했다.

옆을 보니 아내는 여전히 줄기를 따고 있었다.

“이젠 그만 따, 그걸 다 어떻게 반찬을 해 먹어?”

내 말에도 아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푹 삶아서 반찬 만들면 돼, 김치도 담아야겠어”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났다.

고구마를 다 캐낸 자리에는 유채 씨를 뿌렸다.

초겨울을 지나 이른 봄이면,

그 자리엔 겨울을 보낸 파란 유채가 마당을 다 덮겠지.

봄 식탁을 풍성하게 할 그날을 상상하며

가지와 부추를 함께 거두었다.

비가 멎은 하루,

우리는 고구마를 캐고 줄기를 따며

가을 흙냄새 속에서 또 한 계절을 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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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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