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바위틈에 머물다 간 자리에서
봄이 바위틈에 머물다 간 자리에서
4월의 어느 일요일.
백운계곡으로 향했다.
늦가을의 단풍잎을 밟으며 이곳을 걸었었다.
겨울에도 즐겨 찾던 곳이었지만, 바위틈 살얼음에 미끄러졌던 기억이
마음에 상처를 남겼었는지, 한동안 발길을 멈췄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억보다 봄이 이끌었다.
수달래.
계곡 바위틈 사이에서 반기는 연분홍 꽃들이 보고 싶었다.
늘 이맘때쯤이면 와야지 하면서도 해마다 시기를 놓치곤 했다.
이번에도
꽃잎은 바위에 떨어져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흩어져 있었다.
아내는 아쉬운 듯, “4월 초에 왔어야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쉬움도 잠시, 계곡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오르자
방긋이 웃는 수달래가 반기기 시작했다.
"나 여기 있어요!"
이침 이슬을 머금은 다섯 송이 수달래가 바위틈에서 예쁘게 고개를 내밀었다.
봄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서 계곡물은 얕았고,
아내와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렌즈에 담기에 바빴다.
사진을 찍다 보니 때가 지나는 것도 잊었다.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는 폭포 위에 자리를 잡았다.
구운 고구마 세 개, 설날에 먹다 남은 유과 여덟 개와 꿀 생강차.
바위에 앉아 양말을 벗어 신발 안에 살짝 넣고, 발을 따뜻한 바위 위에 놓으니
온기가 온몸을 감싸 올랐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햇살은 조용히 바위 위로 내려앉았고, 나는 발을 물에 밀어 넣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배낭에서 하모니카를 꺼내서 ‘과수원 길’을 불렀고,
아내는 바위틈 수달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이곳
백운계곡은 온통 하얀 바위로 뒤덮고, 그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웠다.
봄이면 수달래가, 여름이면 시원한 폭포가,
가을엔 단풍이, 겨울엔 고드름과 눈꽃이 계곡을 수놓았다.
어느 계절에 와도 좋았다.
계곡에 펼쳐진 바위와 그사이에 흐르는 맑은 물과 합창하는 새소리, 바람소리.
“백운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바위마다 이름이 있고, 폭포마다 이야기가 있다.
탈속, 오담, 칠성… 이름만으로도 이미 한 편의 시다.”
계곡 입구에는
‘용문동천’과 ‘백운동’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마주한다.
청의소 바위에 ‘영남제일천석’이 있고 새겨져 있다,
발길 따라 이어지는 자연의 선물들.
그 사이사이 남명 조식 선생의 흔적과
그를 기리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를 찾을 수 있다.
너무 유명해지지 않고, 자연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사람의 손보다 자연의 손길이 더 많은 곳으로.
이 아름다움을 나만 알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수달래를 다시 찾아온다.